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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없고 ‘욕’금지…이병훈의 ‘옥중화’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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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없고 ‘욕’금지…이병훈의 ‘옥중화’ 현장

입력
2016.05.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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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넘어지는 연기도 한다. 국내 드라마 최고령 연출자인 이병훈(72)PD는 촬영 현장에서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이 PD가 MBC '옥중화' 촬영장에서 직접 소품을 들고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 이정현 인턴기자
직접 넘어지는 연기도 한다. 국내 드라마 최고령 연출자인 이병훈(72)PD는 촬영 현장에서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이 PD가 MBC '옥중화' 촬영장에서 직접 소품을 들고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 이정현 인턴기자

“아이고, 국장님!” 지난 12일 오후 2시50분 경기 용인시 백암면 용인대장금파크. MBC 주말 사극 ‘옥중화’ 촬영장에서 카메라 담당 스태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희끗한 노장 PD가 배우에게 연기를 지도하다 몸이 땅바닥으로 쏠려 넘어지는 줄 알고 놀라서다. 2년 전 칠순을 넘긴 PD가 저잣거리에서 천둥(쇼리)이 장신구를 고르는 여인의 물건을 훔치려 일부러 넘어지는 상황을 시연하다 벌어진 일이다.

발이 꼬여 크게 휘청거렸던 PD는 주위의 “조심하세요”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에게 같은 연기를 주문한다. 무거운 짐을 들다 쓰러지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컷”을 외친 PD는 주위를 둘러보곤 즉석에서 새 아이디어를 냈다. 그가 잡은 건 다른 진열대에 올려져 있던 죽부인. 오른쪽 어깨에 긴 죽부인을 올린 PD는 두리번거리다 소매치기 할 여인의 가채를 치는 상황을 연기한다. 코믹한 설정에 순식간에 현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세게 쓰러질 정도로 쳐야지” “죽부인 메고 180도 돌아”. PD는 극중 주인공인 고수와 진세연이 출연하는 장면이 아닌 데도 이 장면만 한 시간 동안 찍었다. 운동화를 신고 현장을 누비는 ‘사극 명장’ 이병훈(72) PD의 촬영 모습이다. 1년 여 전 목과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한 이 PD는 한 번도 앉지 않았다. ‘밤샘’ 촬영까지 하는 ‘강철 노장’이다. 대신 걱정은 그의 아내 몫이다.

“아내가 그러다 객사한다고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녜요. 밤샘 촬영은 제발 후배에 맡기라고요. 처음에 ‘옥중화’ 한다고 했을 때부터 반대했어요. 촬영하면 당신 응급실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요, 하하하.”

MBC '옥중화'를 연출하는 이병훈 PD는 '덕장'으로 통한다. 촬영 뒤 배우들에게 휴대폰 문자로 아쉬운 연기 지적을 할 때도 ‘♥’나 ‘★’같은 표기를 섞어 부드럽게 충고한다. 이정현 인턴기자
MBC '옥중화'를 연출하는 이병훈 PD는 '덕장'으로 통한다. 촬영 뒤 배우들에게 휴대폰 문자로 아쉬운 연기 지적을 할 때도 ‘♥’나 ‘★’같은 표기를 섞어 부드럽게 충고한다. 이정현 인턴기자

촬영장에서 눈 여겨 볼 점은 따로 있었다. 이 PD의 촬영장에는 ‘아줌마’가 없었다. 단역으로 출연하는 보조출연자라도 카메라 앵글에 잡히는 연기자라면 이름을 불렀다. 극중 이름 없는 백성으로 단역 연기를 한 김 모씨는 “다른 드라마 촬영장에 가면 PD나 스태프들이 ‘어이, 아줌마’라 부르는데 이 감독님은 보조출연자 총괄하는 분에게 이름을 듣고 직접 ‘OO씨’라고 이름을 불러준다”며 “난 아줌마로 촬영장에 온 게 아니라 연기자로 왔다. 이 감독님의 배려가 고맙더라”고 말했다. ‘욕’도 금지다. 그의 촬영장에선 누구라도 욕을 하면 쫓겨난다. 이 PD가 “즐겁게 일해야 결과가 좋다”며 대본 연습할 때부터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한 당부다. ‘소프트 리더십’을 중시하는 이 PD의 촬영 현장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노장’은 죽지 않았다. 이 PD가 연출해 지난달 30일 첫 전파를 탄 ‘옥중화’는 보름 만에 시청률 20%(15일 방송·19.8%)에 육박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옥중화’의 흥행을 예상한 이는 없었다. ‘허준’(1993)과 ‘대장금’(2003) 등 숱한 히트작을 내놓았지만, ‘마의’(2013) 이후 ‘한 물 갔다’는 쓴 소리도 방송가에 돌았기 때문이다. 스타 여배우 캐스팅도 줄줄이 좌절됐다. ‘옥중화’의 여주인공 옥녀 역은 데뷔 4년을 맞은 진세연에 돌아갔다. 이 PD가 전작에서 김희애(‘조선왕조 500년’)와 이영애 (‘대장금’), 한효주(‘동이’), 이요원(‘마의’) 등 당대 스타들과 작업한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스타 여주인공의 공백을 이 PD는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이야기의 힘으로 채웠다. 옥중에서 태어난 아이의 성장담을 내세워 인간적인 얘기에 집중했고, 시청자를 모았다. 뻔한 구도에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소재를 이 PD는 책에서 찾았다.

“MBC에서 ‘대장금’과 ‘동의’를 잇는 여성 사극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뒤 새로운 직업에 대한 고민에 빠졌죠. 도서관에서 ‘조선직업실록’이란 책을 보고 답을 찾았어요. 조선시대에 변호사(외지부)가 있었다는 내용을 보고 신기했거든요. 나라가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주기 위해 외지부를 둔 건 우리나라가 처음이더라고요. 실록을 찾아보니 중인들이 주로 했다는 기록도 있어 여주인공의 직업을 변호사로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죠.”

이병훈 PD와 배우 이영애가 2003년 MBC '대장금'(2003) 촬영장에서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이 PD는 "이영애는 드라마 출연할 때도 톱스타였는데 항상 촬영 시작 30분 전에 와 준비했다”며 성실성을 높이 샀다. 이병훈 PD 제공
이병훈 PD와 배우 이영애가 2003년 MBC '대장금'(2003) 촬영장에서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이 PD는 "이영애는 드라마 출연할 때도 톱스타였는데 항상 촬영 시작 30분 전에 와 준비했다”며 성실성을 높이 샀다. 이병훈 PD 제공

이 PD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극 속에 진취적인 여성상을 내세워 왔다. 그가 그려내는 과거에는 여성이 의술(‘대장금’)을 하고, 변호(‘옥중화’)를 한다. 이 PD가 ‘여성주의적 사극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다. 이 PD는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들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사는 여성들이 공감해야 한다”며 “그래서 사극이지만 의사나 변호사 같이 전문 직종으로 자기세계를 구축해가며 사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연출관을 들려줬다. 이 PD는 ‘옥중화’도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판단에 극중 남자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우 고수 보다 진세연의 이름을 크레딧 상단에 올렸다.

이 PD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대장금’과 이영애다. 이 PD와 비슷한 시기에 이영애도 SBS 새 드라마 ‘사임당, 더 허스토리’로 오랜 만에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앞서 이 PD와 이영애는 ‘대장금2’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방송가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영애씨 부부와 만나 ‘대장금2’ 얘기를 긍정적으로 논의했는데 현재까지로 봐서는 제작이 어려울 것 같아요. 여러 문제들이 얽혀 성사되지 못했죠. ‘대장금2’에는 이영애씨가 반드시 나와 ‘대장금’과 연결성을 갖춰야 하는데, 이영애씨 없는 ‘대장금2’는 의미가 없죠.”

이 PD는 ‘대장금’으로 한류의 새 길을 연 제작자다. 스리랑카부터 쿠바까지 전 세계 100여 개국의 사람들이 ‘대장금’을 봤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 PD가 만든 ‘대장금’과 ‘옥중화’를 들고 최근 이란에 가 ‘문화 외교’를 펼쳤다. 이 PD는 “현대물이 해외에서 한국의 유행을 보여준다면 사극은 우리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고 이를 수출하는 것과 같다”며 큰 의미를 뒀다.

이 PD의 사극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요? 고되긴 하더라고요. 근데 또 모르죠. 촬영할 땐 그렇게 고달프다 2~3년 지나면 잊어버리고 다시 연출을 하니까요. 이번 ‘옥중화’도 그렇고요, 하하하.”

용인=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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