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의 대명사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얼마 전 “돈 찍어 나라 빚을 갚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나라 빚을 늘린 뒤 안 갚을 수도 있다”고 한 발언이 논란이 되자 “(안 갚겠다는 게 아니라) 돈을 찍어 갚으면 된다는 것”이라고 말을 얹은 게 더 큰 공분을 부른 것이다.
그저 남의 나라 얘기라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달러를 마구 찍어 빚을 메우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쏟아진 달러는 전 세계 곳곳으로 흘러 들어가 물가를 끌어 올릴 것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 통화의 가치를 쑥쑥 끌어올려 수출 경쟁력을 악화시킬 것이다. 미국 달러가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기축통화라는 점을 악용해, 미국 국민들이 짊어져야 할 빚 부담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 국민들에게 떠넘기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니, 우리는 트럼프의 발언에 당연히 ‘열 받아야’ 한다. 물론 현실 가능성이 희박한, 또 하나의 ‘막말’ 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국내에서도 돈 찍기 공방이 뜨겁다.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정체불명의 용어로 포장됐지만, 이 공방의 핵심은 기업 구조조정의 재원을 누가 댈 것이냐다. 조선ㆍ해운 등의 구조조정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은 국책은행은 실탄이 거의 없다. 그 실탄을 정부와 한은, 둘 중 누군가는 보충해줘야 한다. 정부가 나서려면 국회 동의를 받아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한은이 돈을 찍어 공급하는 지름길로 가자는 게 정부 논리다.
정부는 여론의 지지를 끌어내는 방법을 잘 안다. 거대 조선ㆍ해운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수 있는 중차대한 시기에 한은이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고귀한 원칙만 주장하며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이냐고 여론에 호소한다. 한은이 돈을 찍어 출자하는 건 곤란하고 대출은 해줄 수 있다며 대안(자본확충펀드)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정부 내에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기류가 팽배하다. 일부 언론도 맞장구를 치며 한은을 몰아 세운다. 한은은 졸지에 나쁜 X가 됐다. 정말 그런가. 어디 한번 따져보자.
조선ㆍ해운이 벼랑 끝에 몰리게 된 책임이 정부와 한은, 누구에게 있는지부터 보자. 수년 전부터 부실 경고음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손을 놓고 방치했고, 부실을 걸러냈어야 할 국책은행에 낙하산을 내려보내 끈끈한 유착관계를 형성한 건 정부다. 아무리 봐도 한은은 이들 업종 부실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어 보인다. 그런 정부가 한은에게 “왜 책임을 방기하느냐”고 돌을 던지는 건 적반하장이다.
정부가 말하는 ‘시급성’도 동의하기 어렵다. 총선 전만 해도 정부 인사 누구도 이런 심각성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총선 때문에 구조조정을 미뤄두고 있다는 지적이 빗발칠 때도 “정상적으로 잘 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던 게 정부였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한은이 나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촌각을 다투는 사안으로 돌변한 이유가 뭔가.
무엇보다 마치 한은이 찍어내는 돈은 누구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공짜 돈인 양 호도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미국이 찍어내는 달러가 전 세계인들의 부담으로 전가되듯, 한은이 찍어내는 돈은 우리 국민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다. 나라 재정처럼 당장 국민들의 세금으로 메워야 할 돈이 아니니까 눈속임을 할 수 있을 뿐, 이렇게 풀린 돈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지갑 속 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니, 정정당당하게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돈을 찍든 세금을 걷든 재원을 조달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는가.
발권력이라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성역이 아닌 게 맞다. 정부 주장처럼 한은은 바뀌어야 한다. 변화를 거부하고, 틀 안에서만 움직이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한은보다 더 많이 바뀌어야 할 곳은 정부다. 이런 한은을 산하기관처럼 닦달해 어떻게 하면 책임을 떠넘길지 골몰하는 행태, 이젠 그만 보고 싶다.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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