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한 명이 죽을 때 박물관이 하나 없어진다. 노벨상을 수상한 월레 소잉카가 사라지는 구전민요와 설화 등을 걱정하며 한 말이다. 대저 그리 생각하면 진땀이 다 난다. 구비문학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먼저 사신 선생님이 아닌가. 그래서 어르신 말씀이라면 분별을 내려놓고 집중해서 새긴다. 우여곡절을 겪고 얻어낸 통찰과 탁견을 아랫것이 어찌 안 배우랴. 특히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임의로 판단을 하거나 곧이곧대로 들으면 틀리는 경우도 많다. 가령 ‘건강을 챙기라’는 조급해하지 말라다. ‘쉬엄쉬엄하라’는 주위를 잘 살펴봐라 다. ‘요새 애들은 똑똑해’ 라는 철들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 원로작가께서 가라사대. 어깨의 힘을 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글이 안 써져. 작가라면 어깨에 힘이 빠져야 해. 나는 그 말을 교만하거나 자만하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겸손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까지 들어보니 아니었다. 그 어깨는 은유가 아니라 진짜 어깨였다. 말 그대로 어깨의 힘을 빼야 한다는.
그 말씀을 따라서 글을 쓸 때 어깨의 힘을 슬쩍 빼봤다. 어라? 희한하다. 잘 써진다. 안 써져도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하게 궁리를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여유가 생겨난다. 해보시라. 이거 참 괜찮은 요령이다. 이제 응용을 해봐야지 싶었다. 신문을 보든 책을 읽든 자전거를 타든 어깨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에 길이 나지 않아서일까, 금방 까먹고 어느새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 생각이 안중에도 없다.
도 닦는 책을 좋아해서 가끔 뒤적인다. 읽으면 괜히 마음이 넉넉해지고 투명해진다. 어디에나 있는 말. 수행할 때는 어깨의 힘을 빼거라. 그런데 막상 해보면 어느새 또 까먹고 힘이 들어간다. 어느 순간, 안되겠다 싶어서 모질게 마음을 다잡았다. 매 순간 어깨를 의식하면서 한 번 살아보자.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깨의 긴장을 경계했다. 한눈을 팔아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싶으면 곧장 다시 빼고, 들어갔다 싶으면 또 빼고 했다. 밥숟갈을 들 때도 뉴스를 볼 때도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어깨에 들어간 힘을 체크했다.
사람 만날 때. 이상하게도 필요 이상으로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간다. 나는 폼을 잡거나 으스대는 성격은 아니다. 어깨에 힘을 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럴까. 다시 의식하고 어깨의 힘을 빼고 나면 조금 더 몸이 안정을 찾고 표정도 풀린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도 아까보다는 더 편해 보이는 기색으로 나를 본다. 내 마음이 자연에 가깝지 않게 긴장을 하는구나. 앗! 숨이었구나.
어깨는 특히 숨쉬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숨이 가빠지면 어깨가 많이 올라가고 숨을 아랫배께로 내리면 어깨도 힘이 빠지면서 내려간다. 결국은 차분한 숨쉬기에 어깨의 편안함이 달렸다. 일정하게 길고 고른 숨을 쉬는 것이 무엇보다 관건. 하지만 막상 내 경우에는 어깨의 힘을 먼저 빼고 나서 숨을 의식하는 게 더 편했다. 숨을 편안하게 쉬려고 애쓰는 것이 어깨의 힘을 빼는 것보다 어려웠다. 수시로 의식을 하였으나 해보면 작심 3분도 만만치 않았다. 해도 어쩌랴. 그저 어깨의 힘을 자주로 빼보는 수밖에. 그렇게 얼마간을 지내보니 어깨가 현저하게 덜 뭉쳤다. 사물을 볼 때 집중력도 늘었고 낯선 사람의 눈도 더 편안히 응시하게 되었다. 또 며칠이나 갈라나. 그래도 지금 마음으로는 어깨의 힘이 빠져서 차분한 사람이 되고만 싶다.
요란했던 노동당 전당대회가 떠오른다. 어깨 위로 손을 올린 채, 그토록 일사불란하게 힘차게 박수를 칠 수 있다니. 참석자분들, 어깨는 과연 안녕하실까. 힘을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는 이상한 사회. 끔찍하다. 위선이다. 그네들의 삶이 딱했다. 긴장한 어깨가 유독 그래 보이더라는.
고선웅 연극 연출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