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장 취임 8개월 만에
‘정윤회 파문’ 구원투수로 등판
대화ㆍ포용 중시 ‘소통형’ 평가
본인이 직접 차 몰고 떠나
“공직자가 떠날 때는 이렇게 떠나는 것이지….”
15일 물러난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한 뒤, 회색 그랜저 차량을 직접 운전해 떠나면서 한 말이다. 말 그대로 ‘훌쩍’ 떠난 그의 얼굴엔 아쉬움과 홀가분함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이 전 실장은 본보 통화에서 “후임자를 찾느라 때를 기다린 것이지, 내가 나가는 건 진작 결정된 일이었다”며 “지금이 내가 떠날 적기”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모든 게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는 새누리당의 4ㆍ13 총선 참패 직후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며 사의를 밝힌 터였다.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청와대가 흔들리던 지난 해 2월, 이 전 실장은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 현 정부에서 일본 대사를 거쳐 국정원장에 취임한 지 8개월 만이었다. 불통 논란으로 청와대가 집중 공격 받는 시점이었던 만큼 ‘소통 형 비서실장’의 등장은 큰 기대를 모았다.
이 전 실장은 정치가 대화와 포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믿는 온건파 정치인이다. 화해와 용서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는 취임 직후 청와대 직원들에게 “직급과 상관 없이 건의하거나 비판할 게 있으면 언제든 내 방으로 와 달라. 내 방 문은 늘 열려 있다”고 했을 정도로 소통을 중시했다. 청와대 인사는 “이 전 실장은 일방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많이 듣고 수석ㆍ비서관들에게 권한을 나누어 주면서 스스로를 낮추었다”고 했다.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과 막후 조정을 통해 지난해 말 한일관계 회복의 물꼬를 튼 것도 이 전 실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한 비서실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해부터 이 전 실장의 사의설과 교체설이 여러 차례 나돈 것은 그의 청와대 내 입지가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인 이 전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타협하는 국정 운영’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다는 얘기들이 흘러 나왔다. 특히 총선 이후 이 전 실장이 측근들에게 무력감을 토로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일부 수석이 이 전 실장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다는 설도 있었다. 이 전 실장과 가까운 사이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의원 등이 청와대ㆍ친박계 강경파와 충돌한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엔 이 전 실장의 리더십이 어울리지 않았던 셈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제가 아는 한 그는 과묵하고 합리적인 분”이라며 “그런 그도 세간에서 염려하던 그 (소통의) 벽을 넘지 못하고 퇴임한다”고 적었다.
최문선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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