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제2당으로 몰락한 4ㆍ13 총선 직후인 15일 박근혜 대통령의 첫 공식 발언은 “흔들림 없는 노동개혁 추진”이었다. 당장은 해운 조선 등 구조조정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청와대의 굳은 의지를 생각한다면 노동개혁은 올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굴 또 하나의 이슈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병원(64)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만났다. 만나기 전 편집국 내에서 “노동개혁과 관련해 인터뷰하려면 균형감을 갖춘 제3의 인물이거나 노사대표를 한꺼번에 만나야지, 사용자 대표만을 인터뷰하려 하느냐”는 형평성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하지만 박 회장은 기업인이 아니라, 2007년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에서 물러날 때까지 공직사회 최고 경제정책통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리던 관료 출신인 만큼 사용자 일방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우리나라 경제 전체를 고려한 노동개혁 해법을 제시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박회장은 인터뷰 일정이 잡히자, 경총이 올해 추진하려는 각종 사업과 자신의 최근 인터뷰 자료 등을 모아 보내줬다. ‘공부부터 하고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보내 준 자료를 꼼꼼히 읽다 보니, 과거 재경부 출입 시절 기자들과 솔직하고 치열한 토론을 즐기던 박회장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인터뷰가 한층 기대됐다.
_노동관련 법ㆍ제도 개혁은 이해 당사자인 노사가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어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인데, 경총을 비롯한 사측의 자세가 너무 소극적이다. 대한민국 경제 전반을 생각하는 차원에서 기업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현재 노동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대립지점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기간제 근로자의 계약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문제는 사용자가 아니라 기간제 근로자 자신이 원해서 하는 거다. 현행법상 기간제 근로자를 2년 이상 쓰면 자동으로 무기계약직, 즉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한다. 그래서 사용자는 2년이 지나기 전에 재계약을 안 하고 다른 사람을 쓰는 것이다. 기간제 근무자들이 2년마다 옮겨 다니기 힘드니까 4년으로 늘리자는 건데 노조가 왜 반대하는 건가. 기간제 근로자의 처지를 대변하는 조직을 만들어 정규직 노조를 설득시켜야 한다. 파견근로도 마찬가지다. 파견근로가 확대되면 기존 정규직 근로자들이 손해를 본다. 근로자가 원하는 사항을 먼저 실현하는 것이 현실적 노동개혁 방안이며 이는 기업의 이해와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기업은 일감이 늘어날 경우 기존 근로자에게 추가 근로를 시키는 것보다 파견 근로자를 쓰는 게 인건비가 덜 든다. 물론 정규직을 더 뽑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는 일감이 갑자기 줄어들 경우 제때 고용을 줄이기 힘들다. 그래서 정상 시급보다 훨씬 비싼 초과근무 수당을 주며 기존 정규직에게 초과근무를 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장근로시간 국가다. 정규직이 1주일에 40시간이나 50시간만 일하고, 그 이상 일해야 할 부분은 미취업 청년들에게 나눠주는 게 바람직하다. 파견근로 문제 역시 일하고 싶은 사람과 기존 정규직 간의 대립이 일차적이다.”
_노동개혁 문제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이고, 기업은 둘 사이 갈등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며 남 탓만 하기엔 현재 경기침체가 너무 심각하다. 많은 경제학자가 현재의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은 생산과잉과 수요 부족이며, 그 뿌리에는 급속히 악화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접어들어 국민총소득(GNI) 성장률을 보면 기업이 가계보다 훨씬 높다. 성장의 과실을 기업에만 가고 있다. 결국 물건을 만들어도 살 사람 주머니가 텅 비어있으니 우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고 고용도 안정시키면 자기가 다니는 회사 물건을 많이 사게 될 것이고, 그렇게라도 수요를 늘려야 하지 않나.
“현재 경제위기 원인에 대해서 동의한다. 지금 세계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공급과잉, 과당경쟁, 수요부족이다. 수요부족 문제를 타개할 방법으로 근로자의 임금을 올리자는 지적은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기업이 올려줄 수 있는 임금의 한계는 어디일까. 국제경쟁력이 유지가 돼야 하는 수준 내에서 올려야 한다.”
_정규직을 확대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4년제 기간제로 연장하는 정도의 노동개혁으로는 생산성 향상도 기대하기 힘들 뿐 아니라 일자리에 대한 불안이 늘어나 소비가 오히려 위축될 수도 있다.
“경총은 노동개혁 과정에서 근로자의 임금을 조금도 줄이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국제 경쟁력을 상실하지 않고 한 기업 또는 한 사회가 지불할 수 있는 고용총량과 임금총액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면 우리나라는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공급과잉, 과당경쟁 때문이다. 최악의 과당경쟁 분야가 유통업종이다. 편의점 구멍가게, 대형소매점, 시장 등은 통계상 선진국보다 2, 3배 과당경쟁 상태다. 만약 이 소매점 숫자가 반으로 줄어든다면 소매점 하나당 매상이 2배로 늘어나고 이익은 2배 이상 일어날 것이다. 그럼 최저임금을 2배 올려줄 여력이 생긴다. 그런데 지금처럼 공급과잉 상태에서 최저임금부터 올리면 결국 사람을 덜 쓰고 소매점 주인이 더 일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일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다. 정년을 연장해서 그 사람들이 계속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옳은가라는 것은 근로자 간의 문제이다. 현 상황에서는 임금피크제로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근로자의 임금을 줄여 미취업 청년들을 몇 명이라도 더 고용하는 게 옳은 방향이다.”
_우리나라 자영업 분야 과당경쟁은 현 경기침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물론 취직이 잘 되면 우동집과 치킨집과 편의점이 늘어나지 않고 줄어든다. 과거 자영업자가 800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680만명까지 줄었으나, 최근 다시 늘고 있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결국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이다. 사람이 남아도는데 노동시장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가격을 올리면 이미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임금을 올려서 좋겠지만 취직이 안 되는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른다.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도 기존 근로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보다 취직이 안 되고 있던 사람을 취직시키는 게 효과가 더 클 거다. 재정경제부에서 일하며 평생 꿈이 국민소득 수준을 높이는 거였다. 월급 안 올리고 어떻게 국민소득 수준을 높이나. 월급 올리는 건 모든 경제하는 사람의 목표다. 하지만 그걸 강제로 할 수는 없다.”
_기업 이익은 제자리걸음이고, 청년들 일자리도 좀처럼 늘어나지 않은데, 어떤 돌파구가 있을까.
“공급과잉을 해소하는 방법 중 으뜸은 외국수요를 끌어들이는 거다. 상품 수출은 이미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고 있다. 서비스업에서 외국 수요를 잡아와야 한다. 그런데 관광분야만 하더라도 적자가 얼마나 큰가. 급성장하는 경제대국 중국이 옆에 있다는 엄청난 지리적 이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중국 관광객 600만명을 유치했지만 고작 이탈리아 프랑스 명품을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 챙기는 것밖에 못 하고 있다. 중국만 해도 관광지에 가면 입장료부터 해서 온갖 방법으로 관광객의 주머니를 열게 한다. 우리나라는 정반대로 국립공원 입장료 무료화를 관광산업 촉진책으로 생각한다. 또 교육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돈을 해외에서 쓰고 있나. 의료와 금융 쪽에서도 우리가 해외에서 벌어오는 것보다 잃고 있는 게 많다. 서비스산업 분야에서 우리의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제조업은 세계 최강인데 서비스업은 왜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가. 서비스업 국제경쟁력 강화도 제조업 경쟁력을 키우는 정책과 본질은 같다. 우리 서비스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제조업보다 훨씬 규제가 강하기 때문이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고급식품, 서비스를 원하는 중국 부유층만 하더라도 우리 인구의 몇 배가 된다. 수입되는 중국 농산물을 막을 생각만 하지 말고, 중국 부자들 식탁 노리고 고급 농산물 만들어서 중국 식탁을 휩쓸 생각을 해야 한다. 제조업에선 고급화를 했는데 서비스업과 농업은 왜 고급화를 안 하는 건가. 복지도 마찬가지다. 보편적 복지의 최대 폐해는 고급화를 원천 봉쇄하는 거다.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서비스의 질이 낮은 이유는 보육료를 규제해서 결국 보육교사 월급을 100만원 밖에 안주기 때문이다. 일자리도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에서 늘어날 여지가 훨씬 크다. 제조업은 경쟁력을 위해서 끊임없이 인력을 절감해야 하는 데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위협까지 있다. 반면 서비스업은 1인당 생산량을 늘린다고 생산성이 별로 높아지지 않는다. 하루 10명 이발하던 이발사가 11명을 이발한다고 생산성이 늘어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 게다가 명품의 경우 퀄리티가 10% 올라가면 값은 10%보다 훨씬 높아진다. 100만원 짜리 와인이 10만원 짜리 와인보다 퀄리티가 10배 좋은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판매량이 줄어도 단위당 벌 수 있는 수입이 훨씬 크기 때문에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게 고급품이며 고급 서비스다.”
_현재 야당과 시민단체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국회 통과에 반대하는 것을 염두에 둔 비판으로 보인다. 의료계와 야당은 이 법이 의료민영화를 위한 포석이라는 의심을 하고 있는데, 의료만 빼고 통과시키면 어떨까.
“한국의 서비스업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의료인데, 이를 빼자니 말이 되는가. 중국의 상위 10% 부자들이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면, 그 시장만 무려 5,000만 명이다. 비영리 병원이란 의료서비스로 돈을 벌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국제경쟁력이 있는 병원을 하나 지으려면 수천억원의 자금이 들 텐데, 이 밑천을 제공한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면 누가 병원을 짓겠는가. 의료의 공공성 유지는 건강보험제도를 잘 지키면 된다. 외국인 환자 유치를 위한 병원까지 공짜 돈으로 지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_결국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면 경제 전체가 좋아진다는 주장인데, 그런 정책을 계속 시행했지만 결국 대기업만 성장하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면 연 5% 이상 수익이 나는 상황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을 만들었는데 참담할 정도로 실적이 없다. 반면 인천과 비슷한 시기 경제자유구역을 시작한 두바이는 이미 금융허브로 성장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철도, 도로, 다리, 아파트 등 물리적 기반시설만 짓는 데 그쳤다. 이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정리=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박병원 회장은
-경기고 졸
-서울대 법학과 졸
-행정고시 17회
-재정경제부 제1차관
-우리금융지주 회장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
-전국은행연합회 회장
-현 한국경영자총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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