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제 자리 찾아가는 아이들 지켜보는 게 보람"

입력
2016.05.14 04:40
0 0

서울 구로지역 빈곤아동의 대모

14년 전 유학 후 공부방 제안 수용

방과후 방치된 아이 200여명 보듬어

“묵묵히 옆에 있는 것으로 충분”

“우리 다 같이 그 동안 가르쳐 주시느라 고생하신 학교 선생님한테 감사편지를 써 볼까?”

12일 오후 4시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파랑새지역아동센터. 1층엔 낡은 목욕탕, 2층엔 태권도장이 있는 허름한 건물 3층에 간판도 없이 자리한 이 센터에 30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센터장인 성태숙(49)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편지지를 꺼내 삐뚤삐뚤한 글씨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12일 오후 서울 구로동에 위치한 파랑새지역아동센터에서 학생들이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학교 선생님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있다. 서재훈 기자
12일 오후 서울 구로동에 위치한 파랑새지역아동센터에서 학생들이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학교 선생님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있다. 서재훈 기자

‘선생님, 속 썩여서 죄송합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써내려 간 편지와 곱게 접은 카네이션을 받을 주인공은 성씨가 아닌 아이들의 학교 담임 선생님. 14년 간 음지에서 묵묵히 학교 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돌봐 온 성씨는 올해 스승의 날에도 기꺼이 그림자를 자청했다. 성씨는 “태양은 꽃이 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빛을 내리쬐죠. 아이들이 제 갈 길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해요”라고 미소 지었다.

성씨는 부모의 방임, 경제사정 등으로 방과 후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이 센터를 공부방 시절인 2002년부터 맡아 온 ‘구로 지역 빈곤아동의 대모’다. 대학(서울대 간호학과) 졸업 후 영국에서 대안교육을 공부한 뒤 귀국하자 마침 공부방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그는 “나도 어린 시절 이 지역에 살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 끝나고 혼자 남겨질 때가 많았다”며 “내 아이들과 함께 숙제 도와주고 간식도 나눠주면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정형편이 어렵고 방과후에 돌봐 줄 어른이 없는 학생들만 받는다는 것이 공부방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성씨는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포기한 아이, 부모에게 방치 당한 아이, 마음의 문을 닫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돌아봤다. 폭력성향이 강했고 학교 결석을 일삼았던 문제 학생을 받아 들였다가 주먹으로 맞은 일, 믿었던 학생이 공부방의 노트북을 훔쳐 달아난 일 등 별일이 다 있었지만, 그는 방과후 교사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 성씨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배 곯으며 자란 아이들은 실수를 더 많이 하기 마련”이라며 “실수를 이해하고 기다려 줄 어른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로 지역의 빈곤 계층 학생 200여 명이 이렇게 그의 손에서 돌봄을 받았다.

실망하고 좌절한 일도 있었지만 방황을 끝내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학생을 지켜보는 일은 보람이었다. 8년 전 엄마 손에 억지로 공부방에 끌려왔던 한 초등학생은 지금은 지역사회의 청소년 문화 행사를 기획하고 돕는 청소년복지활동가가 됐다. “아버지 학대로부터 도망쳐 어머니와 어렵게 살았지만 ‘파랑새에서 받은 만큼 너도 꼭 다른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는 그 아이의 말을 잊을 수 없다”는 성씨는“비록 교사 자격증을 가진 정식 교사는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키워야 할 책임이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돌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시는 이런 공로를 인정해 지난해 성씨를 서울시 복지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성씨의 마음은 아이들이 더 잘 안다. 부모님이 모두 아파 다른 동네에서 버스로 30분 거리 공부방까지 매일 다니고 있다는 최민아(가명ㆍ10)양은 “담임 선생님한테 편지 다 쓰고 ‘태쌤’한테 더 길게 편지를 쓸 거에요”라며 “속상할 때 따뜻하게 안아주고 항상 밝게 웃으면서 인사해주는 태쌤이 저는 정말 좋아요”라고 활짝 웃었다. 아이들의 마음 속에 그는 이미 스승의 날 주인공이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