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전씨 등 5ㆍ18 유공자 7인
서울서 ‘오월 광주 치유 사진전’
이씨,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 마비
“진실 밝히는 게 마지막 바람”
“우린 죽는 게 치료지. 의학이 발달한다고 트라우마가 지워지겠나. 상처야 꿰매면 되지만 36년간 사무친 골병은….”
5ㆍ18 민주화운동 유공자 이성전(67)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13일 광주 치평동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물리치료를 받은 직후였다. 이씨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뇌졸중 때문에 반신이 마비돼 2011년부터 몸 왼쪽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는 “물리치료를 받으면 조금 낫긴 하지만 완치는 안 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씨는 이 센터에서 물리치료를 받는 한편 사진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사진을 찍는 취미를 붙였다. 16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열리는 ‘오월 광주 치유사진전-기억의 회복’에 이씨의 사진이 전시된다. 광주트라우마센터가 5ㆍ18 36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이 사진전은 이씨를 비롯해 5ㆍ18 유공자 7인이 촬영한 사진 100여 점을 전시한다.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한 임종진 사진심리상담사가 전시회를 함께 마련했다.
사진전에 참여한 이들은 1980년 당시 모두 평범한 사회인이거나 학생이었다. 제재소에서 일하던 박갑수씨는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작전에 분개해 학생들의 시위를 도왔다. 석재공장을 운영하던 이행용씨는 계엄군이 자신의 공장에 주둔한 것에 분노해 시민군에 합류했다. 이무헌씨와 곽희성씨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당시 양동남씨는 재수생, 서정열씨는 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은 이후 경찰에 체포돼 악랄한 고문을 당했고 지금까지 육체적ㆍ정신적 외상으로 36년째 고통받고 있다.
광주 동남쪽에 있는 화순에서 살고 있던 이성전씨는 5월 21일 광주에서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말을 듣고 마을 주민들과 무기를 구하러 나섰다. 광주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것을 17, 18일 목격한 터여서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싶었다고 한다.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를 구하러 다녔죠. 다이너마이트 200발을 구한 뒤 불붙여 던지면 바로 폭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민군에게 일부 넘겨주고 24일까지 시위를 하다 잠깐 눈 좀 붙이기 위해서 화순으로 넘어갔는데 다시 광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계엄군이 길목을 막았으니까요. 그러다 7월 1일 형사들에게 연행됐습니다.”
이씨에게 여름은 곧 고문의 기억으로 얼룩진 계절이다. 일제 강점기 유치장이었던 화순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물에 젖은 소나무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다. 형사들은 ‘너희들은 폭도, 빨갱이니까 이러다 죽어도 양면지 하나면 끝난다’라며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무릎을 꿇게 하거나 몇 시간씩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은 물론 온갖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했다. “상무대 영창에서도 고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상부 지시에 따라 하지도 않은 여러 일을 했다고 자백하라고 했어요. 조사를 받고 나면 또 다른 조사를 하면서 원하는 조서를 억지로 꾸며 냈죠. 어떻게든 간첩, 빨갱이로 몰아가려고 했던 겁니다. 화순에서 한 달, 상무대에서 넉 달을 그렇게 끌려다녔어요.”
이씨는 재판에서 12년 형을 선고 받았다가 이듬해인 1981년 4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국가의 폭력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취직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가 광주에 올 때면 형사들이 집 주변을 에워쌌다. 정의를 위해 싸운 동지들이 하나둘 의문사나 자살로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이씨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억울하게 당했는데,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어 간첩, 폭도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씨는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죽은 나무에서 핀 버섯을 찍으며, 먼저 떠난 옛 동료들을 떠올렸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먼저 간 사람들은 그래도 이름을 남겼잖아요. 버섯을 보며 그 생각을 했습니다. 썩어가는 벚나무에서 꽃이 피는 걸 보니 마치 저 같았어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입은 살아 있잖아요. 사진을 찍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젠 사물을 보며 인생을 많이 연관시키게 됩니다. 취미가 생기니까 고통도 잠시 잊게 되더군요.”
이씨는 “민주화운동에 매달리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한 점이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이씨가 이번 전시에 내놓은 사진 중에는 공원에서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그는 “봄날 공원을 메운 가족들의 평범한 일상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며 “기회가 된다면 가족들과 저 공원에 둘러앉아 환하게 웃는 날을 맞이했으면 싶다”고 적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솔직히 가정을 버리다시피 했습니다. 마흔 다 돼서 결혼해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이 병에 걸렸는데도 제대로 신경을 안 썼어요. 처음부터 큰 병원에 갔으면 살렸을 텐데. 화순과 광주에서 10년 넘게 병원에 다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알라질증후군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병이 심해져서 간을 이식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돈이 없어서 결국….”
36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이씨는 “지금도 나무 몽둥이만 보면 깜짝 놀라서 경직될 정도로 불안감이 크다”며 “총상은 아물 수 있겠지만 고문으로 받은 상처는 지울 수가 없다”고 했다. 5ㆍ18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이씨의 마지막 바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먼저 돌아가신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죠. 장애인이 됐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상을 밝히고 우리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습니다.”
광주=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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