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걸 굿 걸
수전 더글러스 지음·이은경 옮김
글항아리 발행·580쪽·2만3,000원
여성의 외모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중매체의 집착은 거의 편집증적이다. 직종과 분야를 가리지도 않는다. 아무리 유능하고 지적인 여성이어도, 아름답지 않으면 혹독한 비난과 조롱에 직면한다.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뤄낸 재닛 리노를 보자. 185㎝의 장대한 키에 외모를 치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토크쇼와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였던 그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서는 아예 남자에게 사랑 받지 못해 괴로워하며 합성 헤로인을 먹고 로봇처럼 춤 추는 애정 결핍자로 묘사됐다. 점잖은 뉴스 매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나 수전 라이스와 달리, 리노는 감히 “여성성의 가면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행태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하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성이더라도 남성을 유혹할 만한 아름다운 매력을 갖추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젊은 여성들은 이제 기꺼이 스스로 성적 대상이 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므로 여성 차별 따위와는 관련이 없다. 유능하며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과, 아름답고 섹시하고 싶다는 욕망은 아무런 모순 없이 동시 추구가 가능하다. 나쁠 것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소 심각하다. 여성이 스스로 아름답고 섹시해지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성차별주의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힘과 선택권이 부여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여성 본연의 자리’인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가부장제의 전략에 복무하게 되는 탓이다. ‘배드 걸 굿 걸’의 저자인 여성학자 겸 문화비평가 수전 더글러스는 이것을 ‘진화된 성차별(enlightened sexism)이라 부른다.
영국 여성그룹 스파이스걸스가 ‘워너비(Wannabe)’를 부르며 “여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거라면 당장 꺼져”라고 외쳤을 때, 1990년대를 위한 새로운 페미니즘 ‘걸 파워’가 대두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노래를 부르려면 탱크 탑과 핫팬츠를 섹시하게 소화할 수 있는 매끈한 몸과 미모가 필요하다. 브라를 불태우던 1970년대의 페미니즘은 촌스럽고 유머 없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과격하고 적대적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지며, 이제 여성들은 여성스러운 매력을 배척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여성스러워지고 남성에게 사랑 받는 존재인 동시에 성차별주의를 비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모순된 목표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진화된 성차별주의의 목표가 “여성들이 가부장제를 기분 좋게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된 성차별이 싹 트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의 미국 대중문화를 면밀히 분석한 책 ‘배드 걸 굿 걸’에서, 저자는 끊임없이 아름답고 섹시한 외모에 대한 강박을 요구 받는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미국에서 가슴확대 수술을 받은 사람의 숫자가 1992년 3만2,000명이었으나 2004년에는 24만7,000명으로 8배 가까이 급증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여성에게 ‘선택’이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게 이 시대 페미니즘이 직면한 착시의 가장 큰 원인이다. 선택해야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에게는 애초부터 필요 없던 선택을 왜 여성은 해야 하는가. 왜 여성은 유능한 것과 아름다운 것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가, 저자는 묻는다. 임신한 나체의 섹시한 아름다움을 과시한 데미 무어의 전설적 사진 이래 임신은 여성 셀러브리티의 최후 사명이 됐고, 헌신적인 엄마가 되기 위해 일을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고위직 여성은 ‘시대의 진정한 여성’으로 추앙 받는다.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들은 자신이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여성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반드시 여성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시대가 여성에게 허용한 해방의 최대 반경이다. “모든 것을 가졌다는 환상에 싸여 사회적 약자임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유쾌한 방식으로 자각시키는 책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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