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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린 스승들

입력
2016.05.1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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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에서 자그마한 모임을 가졌다. 각자 한 가지씩 음식이나 술을 들고 오는 포트럭 파티였다. 그 자리에 모인 7명은 내가 여행길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남과 여,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종교인과 비종교인, 기혼자와 비혼자, 직장인과 프리랜서가 골고루 섞인 자리였다. 우리는 밤이 새도록 먹고, 마시며, 이야기했다. 희망이라는 서글픈 단어가 슬며시 다가온 지난 선거를 이야기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의 비극을 나누었고, 이 나라에서 여성이자 싱글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토로했다. 맥주 캔이 50개 넘게 쌓여가는 동안 우리들의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다들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고 현명했다.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O는 지금의 구태의연한 저항의 방식으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저항, 신선한 언어가 필요하다고 조곤조곤 말했다. 분노에 장악당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서도 싸울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는 간디의 길을 가고 있었다. 십 년 전 인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기보다 십수 년 나이 차가 나는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녀의 맑고도 강한 기운에 밀리고 있었다. 이집트 다합에서 만났던 H는 자신의 모교에서 교수 채용 공고가 났을 때 내정자가 있다고 지원을 철회하라는 압력에 반발해 원칙대로 지원서를 넣었다. 결국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지만 당당하게 싸우고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인 강단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일에서처럼 사랑에서도 용감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외국인과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자 헤어졌다 말하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제야말로 부모님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내 삶을 살아야 할 때라고 하면서. 스물다섯의 총명한 J는 화학자를 꿈꾸던 대학원생이었다. 지도교수의 횡포와 과중한 업무로 몸을 상해가며 일하다 결국 길을 틀었다. 망가지는 자신을 더는 참지 못해서였다. J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도 그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실험실 상황을 시트콤처럼 재미나게 엮어 이야기해주곤 했다.

이 어린 친구들은 나에게 벗이자 스승이다. O로부터는 해가 갈수록 단단하게 내면의 평화를 일구어가는 지혜를, H로부터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차분하게 설득해내는 논리의 힘을, J에게서는 놀라울 만큼의 묵묵한 성실함을 배운다. 그런 점들은 내가 지니지 못한 미덕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되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된다. 20, 30대가 무기력하고 꿈도 없으면서 이기적이라는 일부의 평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책임은 우리 세대에 있다. 한 나라의 젊은 세대가 꿈을 꿀 수 없다면, 도전과 실패라는 청춘의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면,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이어야만 한다면 비난은 그런 사회를 만든 우리의 온전한 몫이다. 내가 만난 많은 젊은 친구들은 우리 세대의 뻔뻔함과 비겁함을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성공이나 돈을 위해 함부로 자신을 버리거나 속이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논어의 가르침대로 두려워할 만한 후배들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이야기가 무르익을수록 내 고루함과 편협함도 조금씩 드러났다. 그런데도 좋았다. 사람이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지는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 만남은 ‘접속’이 아닌 ‘대면’일 때 더 위대한 삶의 학교가 된다. 카톡 말고, 메신저 말고, 전화 말고, 마주 앉기.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잠도 자면서 웃긴 이야기에는 어깨를 두드리며 웃고, 슬픈 이야기에는 손을 잡아가며 울어야 한다.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하고 쟁하며 깨져야 한다. 그래야 지혜롭게 나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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