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워시(White-wash)’의 통상적 의미는 ‘더러운 곳을 가리는 행위’이다. 마감이 제대로 안되어 지저분한 벽면을 흰색 페인트로 덮거나 눈에 띄는 단점에 관심이 덜 가도록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도 보통 ‘화이트워시’로 부른다. 최근 미 할리우드에선 이러한 ‘화이트워시’가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회 전반에선 인종 다양성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정작 실제 사회를 투영하는 스크린에선 아시아인 등 소수 인종 배우의 선택을 크게 줄이고 이를 ‘화이트’, 즉 백인 배우로 채우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백인(White)으로 영화의 단점을 씻는다(Wash)’는 중의적인 해석마저 불러일으키는 ‘화이트워싱(Whitewashing)’논란은 미국 영화계의 오랜 인종차별 논쟁마저 끄집어내면서 영화인과 팬들의 비난을 부추기고 있다.
백인이 한국인, 티베트인 캐릭터 줄줄이 맡아
할리우드에서 화이트워싱에 대한 반발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마션’이 개봉된 10월을 전후해서다.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에서 한국계로 묘사되는 미항공우주국(NASAㆍ나사)의 과학자 민디 박을 백인 배우 맥킨지 데이비스가 맡으면서다. 이 영화에선 역시 소수인종인 인디언 원주민으로 그려졌던 캐릭터를 흑인 배우 치웨텔 에지오포로 뒤바꿔 논란을 키웠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알로하’에서도 중국인과 하와이원주민 혼혈 캐릭터를 백인 배우 엠마 스톤으로 캐스팅해 많은 영화계 인사들의 비난을 샀다. 이런 가운데 최근엔 드림웍스가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영화화 하면서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 역으로 백인 배우 스칼렛 요한슨을 선택해 논란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디즈니와 마블 스튜디오가 11월 개봉을 목표로 제작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도 원작 만화에서 티베트인으로 등장하는 에이션트 원 역할을 역시 백인인 틸다 스윈튼에게 맡겼다.
이러한 화이트워싱은 원작을 미리 경험한 영화팬에게 적잖은 혼선을 주고 문화다양성 확산이라는 영화 본연의 역할에 배치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미 할리우드의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2014년 제작ㆍ상영된 할리우드 영화 163편을 분석한 미 캘리포니아 대학의 ‘2016년 할리우드 다양성 분석 리포트’에 따르면 대상 영화들의 주연배우 가운데 백인을 제외한 소수인종의 비율은 12.9%에 그쳤다. 소수인종의 비율이 미국 인구의 37.9%(2014년 기준)에 달한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러한 캐스팅 비율은 다분히 비현실적으로 보여진다. 더구나 이러한 추세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2013년 소수인종 주연비율은 16.7%로 1년 새 4%포인트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화이트워싱을 몰아내자” 거듭되는 반대운동
이처럼 할리우드가 주요 배역에서 아시아계 등 소수인종을 무리하게 배재하는 주된 이유는 다름아닌 ‘자본의 논리’때문으로 분석된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흥행에 실패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 소수인종 배우를 주역에 앉힐 경우 감당할 리스크가 크다는 계산에서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각본을 쓴 맥스 랜디스는 “아시아 여배우 가운데 A급으로 평가할 만한 인물이 그렇게 흔하지 않다”며 화이트워싱에 대한 비난에 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인종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영화 팬에겐 보다 현실적인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화이트워싱을 적극 반대하고 나선 운동이 최근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달 초 한국계 미국인 코미디언 마가렛 조와 작가 엘렌 오, 대중문화 전문 인터넷 사이트 ‘너즈 오브 칼라(The Nerds of Color)’ 등이 앞장서 화이트워싱 철폐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화이트워싱 아웃(WhitewashedOUT)’이란 해시태그(#)를 붙인 트윗을 올리면서 백인일색의 영화계를 비판했고, 하루 만에 6만여 명이 댓글을 달며 동참했다. 반(反) 화이트워싱 전선으로 뛰어든 이들은 “아시안계 미국인은 전무한 것처럼 연기하는 할리우드에 완전히 질렸다”라며 “더 이상 화이트워시가 이뤄진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일명 ‘존 조 출연시키기(StarringJohnCho)’라 칭하는 흥미로운 이벤트도 영미권 SNS 이용자들의 큰 호응을 받고 있다. 국내 팬들에겐 영화 ‘스타트렉(Startrek)’시리즈 출연배우로 잘 알려진 한국계 존 조의 사진을 화이트워싱 논란을 일으킨 영화 포스터와 합성시켜 이를 SNS로 퍼트리는 풍자적인 이벤트이다. 존 조는 할리우드에서도 연기력을 크게 인정받은 배우이지만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조연에 주로 묶이는 화이트워싱의 희생자를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BBC는 10일 ‘존 조 출연시키기’운동 홈페이지(starringjohncho.com)를 소개하며 “많은 네티즌이 만일 존 조가 백인 배우를 대신해 주연으로 등장한다면 화이트워싱이 이뤄진 영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유쾌하게 이벤트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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