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 주인공의 각성
망각 속에 감춰진 진실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추적
“악도 생존의 필수요소라니…
내 안의 악을 응시하는 이유?
타인의 행복에 책임이 있으니까”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발행ㆍ384쪽ㆍ1만3,000원
남의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를 빼는 가장 빠른 방법은 뭘까. 달라고 한다, 손목을 잡아채 빼낸다, 손가락을 자른다. 마지막은 사이코패스의 사고회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답으로 자주 언급된다. 공감 불능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 사이코패스란 소재를 가지고 정유정 작가가 돌아왔다.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낸 장편소설 ‘종의 기원’은 예약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온라인서점 알라딘 등에서 하루키 신작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이 사회가 내리는 유일한 처방은 격리죠. 일반인과 사고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교육이나 학습이 소용 없다고 해요. 하지만 전 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을 초토화시키는 악에 대처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악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작가는 12일 합정동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세 번이나 부수고 다시 쓴 건 ‘내 심장을 쏴라’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작가가 ‘타고난 악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0년대 중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패륜아 사건이다. 부모의 몸을 수십 차례 칼로 찌른 뒤 집에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하고 여자친구와 희희덕거렸다는 그를 뉴스로 접한 후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형태로 착상됐다”고 한다. “쓰고 보니 주인공이 생기가 없더라고요. 내가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죠. 윤리가 아닌 실용적 사고로 사람을 대하는 사이코패스에 이입하기 위해 주인공과 거리두기를 아예 포기했어요.”
소설은 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잠에서 깨어난 유진은 아래 층에서 예리한 칼에 목이 잘려 살해된 어머니를 발견하고,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했을까 생각하던 중 거울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살인자를 찾기 위한 추리가 시작되면서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던 끔찍한 진실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의 이전 글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엔 난이도가 없다. 작가는 초반에 범인을 밝혀버린 뒤 그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동갑내기 여자아이의 머리를 우산대 위에 꽂은 그림을 그려 선물하는 아이, 충격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아이를 통제해보려는 엄마, 의문의 사고로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형, 최근 동네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사건까지. 작가는 상위 1%에 속하는 사이코패스 주인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살인기계로 각성하는지를 바짝 밀착해서 좇아간다.
“프로파일러들에 따르면 이들은 포식자예요. 무서운 건 진화생물학관점에서 비둘기 사이에 포식자인 매가 어느 정도 섞여 있어야 집단의 생존능력이 높아지고 건강해진다는 거죠. 악이 생존에 필수요소란 거예요. 평범한 비둘기라고 믿는 자신 안에도 매가 있을 수 있고, 우린 그걸 응시해야 해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책임이 있으니까요.”
주제의 묵직함과는 별개로 소설은 서사의 매력과 영화적 박진감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작가는 시체가 들어있을 게 틀림 없는 궤짝 앞에 독자를 세우고 그 뒤에 조용히 살인마를 배치하는 설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지금까지 낸 모든 소설이 영화화됐듯 ‘종의 기원’도 일찌감치 영화화를 위한 판권 계약 조율에 들어갔다.
독자와 괴리된 한국 소설 시장에서 드물게 고정독자를 확보한 정유정 작가는 침체의 대안을 찾으려는 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모델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가 문제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단언한다. “순문학이 침체했으니 장르문학이 답이라는 생각 자체가 문제가 뭔지 모르는 거에요. 문제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그 나머지를 문학이라 부르는 거죠. 한국 문학은 소설로부터 이야기를 거세해버렸어요. 모든 작가가 이야기꾼이 돼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젊은 작가들이 맘 편히 이야기를 쓸 수 있는 토양은 마련돼야죠.”
차기작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재난 스릴러다. 세월호 참사와 연관성을 물었더니 “좀더 판타지에 가깝게 다룰 것”이라고만 귀띔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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