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결정하는 건 먹거리를 틔운 땅과 물이다. 고유한 기후와 대지, 해수는 남다른 식재료의 풍미를 낳고 특유의 역사와 토박이들의 기질은 별미를 만든다. 이런 원재료의 맛을 잘 살린 요리는 외지인의 발길을 이끈다. 고향이었던 적도 없는 마을에 대한 향수를 앓게 하기 때문이다.
제주는 최근 뭇사람들의 여벽(旅癖)을 흔드는 매력으로 빛나는 땅이다. 처음엔 청정 제주의 풍광에 끌렸던 이들은 이제 제주 전복, 오분자기, 말고기, 나물, 보리밥, 된장, 오메기떡 등에 환호한다. 차(茶), 화장품으로도 이어지는 제주산물에 대한 찬가는 가히 ‘제주는 언제나 옳다’는 수준이다.
이런 제주의 맛에 이번엔 국내외 탑 셰프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올해 처음 마련된 한 음식 축제 덕분이다. 제주푸드앤와인페스티벌(JFWF) 조직위원회 주최, (사)제주푸드앤와인페스티벌, 제주관광공사 주관으로 5~14일 열리는 2016JFWF를 찾았다.
맛의 방주 지키는 사람들
“끓이지 않은 된장을 즐기는 곳은 전국에서 제주뿐이에요. 간장, 소금만으로는 다 다스릴 수 없는 야생의 재료들을 취하다 보니 된장 문화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죠.”
11일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에 자리한 된장농장인 한라산 청정촌에서 만난 에드워드 권 셰프와 싱가포르 출신 패스트리 셰프 재니스 웡은 푸른콩된장 공부에 한창이었다. 제주 농수축산물을 알리기 위해 열린 이번 축제에는 두 사람을 비롯해 로이 야마구치, 알란 웡, 조시아 시트린, 마사하루 모리모토 등 해외 셰프들과 안효주 류태환 김형규 김승민 셰프 등 최정상 셰프 18인이 초청됐다.
이날 된장수업은 본행사에 앞서 미리 입도한 셰프들이 제주 식재료와 만나는 다양한 체험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농장 박영희 대표와 남편 김민수 대표가 “제주는 1629년부터 약 200년간 출륙금지령이 내려질 정도로 오랜 세월 격오지였다”고 설명하자 두 셰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푸른콩장은 그 중에서도 한라산 이남 지역에서만 전해진다. 지난 수십년간 감귤류의 인기로 농촌이 대부분 밀감만 단작하는 데다, 늘어난 콩밭에서도 대부분 기업들의 콩나물콩 재배만 이뤄져 푸른콩 수확량이 눈에 띄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대야에 가득 담아 식힌 찹쌀밥에 푸른콩가루를 부어 섞자 전분이 조금씩 녹았다. 옆에서 “인간 믹서기가 출동했다”고 놀랄 정도로 권 셰프가 신나게 섞어 문지르자 물기가 자르르해진 반죽에서 가만한 단맛이 물씬 돌았다. 웡 셰프는 “일본식 미소된장은 써봤지만 쌀이나 보리가 들어간다는 것도, 장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모두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녀는 표고버섯, 미소된장 등 과감한 재료들을 써 창조적 디저트를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3년엔 자신이 공부한 르 꼬르동 블뢰가 꼽은 아시아 최고 패스트리 셰프로도 선정됐다.
메주를 빚고, 항아리에서 발효시키는 등 여러 장 제조법이 있지만, 이날 배운 것은 푸른콩가루로 고추장을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찹쌀 1㎏, (푸른)콩가루 500g를 섞은 반죽에 고춧가루 1㎏, 소금 400~500g를 더한다.
푸른콩가루를 활용한 장은 발효과정에서 콩 단백질인 이소플라본이 더 급속히 늘어 은은한 단맛이 강하다. 이를 만들고 맛보던 웡 셰프가 연신 한국 장들의 특징, 활용법 등을 궁금해하자 옆에서 책임감을 느낀 듯 권 셰프가 설명에 더 분주해졌다. 그는 “해외에서 일본 미소나 간장 브랜드는 다들 아는데, 아무리 큰 도시에서도 한국 간장이나 된장 구하기는 쉽지 않은 게 늘 안타까웠다”고 했다.
박 대표는 “원조를 따지는 게 중요할까 싶지만 콩, 대두의 원산지는 본래 만주와 한반도 지역인 데다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 장의 종류가 압도적으로 다양한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제주 토박이인 박ㆍ김 두 대표 부부는 대대로 배운 전통방식으로 20년째 장을 빚었고 이들의 푸른콩된장은 2013년 국제슬로푸드협회의 전통음식 보전 프로젝트인 ‘맛의 방주’ 제1호 음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음식 하는 사람들이 이런 걸 더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2년 전 국제행사 갈라 디너에서 된장 맛을 활용한 아이스크림을 내놨는데 반응이 정말 ‘와우!’였거든요.”(에드워드 권 셰프)
제주 식탁에서도 된장은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찬물이 된장을 심심하게 풀어낸 자리물회, 해물과 된장을 뭉근하게 끓여 감칠맛을 내는 오분자기 뚝배기, 고사리무침 등에 빠짐없이 들어간다. 담수가 부족한 제주에선 예부터 밭과 물에서 일하며 된장을 살짝 풀고 채소를 썰어 넣은 냉국을 즐겼다. 박 대표가 덧붙였다. “그만큼 살기 어려웠다는 얘기죠. 어른들이 요리를 잘하는 것보다 어떤 나물을 언제 무쳐 먹어야 하는지 아는 지혜를 중요한 덕목으로 쳤어요. 5월 제주에서만 나는 양하가 대표적이에요.”
두 셰프의 식재료 토론은 미식체험행사 제주고메위크(Gourmet Week) 참여 식당 중 하나인 ‘대우정’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됐다. 아니나 다를까 간장 양념을 대동한 전복솥밥, 된장을 푼 해물뚝배기가 상에 올랐다. 웡 셰프는 안 그래도 장난기 어린 눈을 더 빛냈다. “사실 된장 냄새가 좋진 않잖아요. 그런데 이 냄새를 만드는 발효의 개념이 인상적이었어요. 푸른콩가루나 장을 디저트에 활용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보통 재료를 가지고 다니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준비 안 했거든요. 한라봉, 백년초 모두 처음 써보는 재료인데, 이곳 제주에서 제가 뭘 완성할지 저도 알 수 없다는 게 신이 나네요.”
셰프 사로잡아야 세계화
전날엔 한수풀해녀학교에서 셰프들의 물질 체험도 이뤄졌다. 전복을 직접 딴 건 처음이었다는 에드워드 권 셰프는 “국산 식재료를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요리사들”이라며 “이들이 현지로 파고들어 보고 느끼고 만지고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으면 이 재료를 본국에 돌아가서도 찾게 되고, 그 관심은 인근 식당으로 전체 지역으로 확대되는 등 파급력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제주 농수축산물을 알리고 미식관광 열기를 한층 더 불어넣는 게 이번 축제 중요 취지다. JFWF는 올해 6회째를 맞은 하와이푸드앤와인페스티벌을 본떴다. 하와이 축제는 이번에 초청돼 방한한 로이 야마구치, 알란 웡 셰프가 창립했다. 한국 셰프 중에는 유일하게 1회, 3회 축제에 초청됐던 에드워드 권 셰프는 “저만 해도 하와이 참치를 활용한 포케(Poke)를 해보곤 돌아와 레스토랑 메뉴에 올렸다”며 “셰프 중엔 예술가적 기질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아 다양한 영감을 제공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18인의 셰프들은 축제 기간 동안 다양한 요리를 선보인다. 12일 오후에는 하얏트리젠시제주 야외정원에서 셰프 11인이 각 부스에서 제주 해산물, 육류, 채소를 활용한 자신만의 레시피를 선보이는 행사(‘Bounty of Jeju’)가 열렸다. 13일에는 종일 제주한라대 한라컨벤션센터에서 셰프 10명이 각자 제주 특산물을 활용한 자신의 요리를 시연하는 특강이 열린다. 국내와 국외 셰프가 한 사람씩 짝을 이뤄 5개 세션을 구성했다. 13일 오후에는 제주한라대 한라컨벤션센터에서 제주 향토 음식 무료시식회가 열린다. 행사의 막을 내리는 14일 저녁에는 해비치호텔과 리조트제주 그랜드볼룸에서 7명의 셰프가 7가지 코스 정찬을 내놓는다. 시연회, 갈라 디너 등은 티켓 예약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14일까지 제주 전역에서 이어지는 제주고메위크도 또 하나의 즐길 거리다. 제주에 살고 있는 음식, 문화 등 분야별 인사들로 추천위원단을 꾸려 숨은 맛집을 추천 받았고 100군데 중 참가에 동의한 50군데 목록을 공개했다. 식당은 축제 기간 중 방문하면 ‘국수를 곱빼기로 준다’, ‘한라산 소주를 선물한다’는 등 저마다의 혜택을 내걸었다.
JFWF의 또 다른 특징은 축제 수익금 전액을 조리학과 재학생 등 제주지역 인재들의 육성을 위해 기부한다는 것이다. 초청 셰프들 역시 취지에 공감해 모든 행사에 재능기부 형태로 참가했다. 특히 제주한라대 호텔조리학과 학생 수십 명은 요리자원봉사자로 축제에 참여해 평소 선망하던 셰프들과 짝을 이뤄 곁에서 실무경험을 쌓는다.
셰프 군단이 한 자리에 처음 모인 11일 저녁에는 제주도 향토음식명인 1호인 김지순 명인이 제주 식재료를 활용한 정갈한 음식들을 선보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제주 전통 된장 드레싱에 얼갈이 배추를 곁들인 생채, 절인 배추를 착즙한 감귤에 농축한 백김치, 생톳과 문어를 활용한 초무침, 한라산 표고를 재운 양념구이 등이 상에 올랐다.
축제 내내 셰프들의 오락반장을 자처한 에드워드 권 셰프는 축제의 미래를 낙관했다. “하와이 축제도 3회에 다시 방문했을 때 분위기가 정말 달랐거든요. 해를 거듭할수록 체감효과가 생기니 지역 전체의 축제로 거듭나는 느낌이었죠. JFWF도 지역주민 전체가 기다리고 만끽하는 축제가 됐으면 합니다.”
제주=글ㆍ사진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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