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이탈리아가 수십년 논쟁 끝에 ‘동성 부부’를 법적으로 허용했다. 서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동성 간 결합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탈리아가 움직이면서 인권 선진국을 향한 유럽의 발걸음이 재조명 받고 있다.
이탈리아 하원은 11일(현지시간) 부부가 되고자 하는 동성 커플에 성(姓) 공유, 재산 상속 등 권한을 부여하는 ‘시민결합(civil union)법’을 찬성 372표, 반대 51표로 최종 가결했다. 이탈리아 의회에 동성 시민결합 법안이 제출된 지 30년만의 쾌거다. 그동안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인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에 보수적인 바티칸의 영향력 때문에 법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 마테오 렌치 총리가 내각의 명운을 건 신임투표로 강력하게 입법을 추진하면서 마침내 최종 승인을 받아냈다. 이탈리아 최대 동성애자 모임인 아르치게이(Arcigay)의 프랑코 그릴리니 명예 대표는 “이탈리아인의 시민권 보장을 막은 ‘바티칸 벽’이 무너진 역사적 순간”이라고 자축했다.
이탈리아의 변화에는 무엇보다 주변 국가들의 영향이 컸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서ㆍ북유럽 국가들은 1989년 덴마크를 시작으로 시민결합 또는 그보다 높은 수준의 권리를 보장하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독일ㆍ스위스는 이탈리아와 유사한 수준의 시민결합을, 프랑스ㆍ스페인ㆍ영국은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유럽인권재판소가 이탈리아의 반(反)동성애 법제가 유럽인권협약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린 것 역시 이탈리아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시민결혼법이 이성부부의 결혼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지는 않는 만큼 논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시민결혼법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 중 대표적인 것이 자녀 입양 권리와 신의의 의무다. 특히 입양 허용 조항은 초기 정부안에 포함됐다가 동성 부부의 대리모 사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 삭제되고 파트너 자녀에 대한 친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릴리니 아르치게이 대표는 “동성결혼을 인정받을 때까지 투쟁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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