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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카시아 꽃향기

입력
2016.05.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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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국의 과수원은 열매솎기로 바쁘다. 올봄은 기온도 높고 비도 적당히 온 데다 서리 피해도 없어서 과일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더불어 열매도 많이 맺혔다. 사실 나중에 익어서 시장에 나오고 우리가 먹게 되는 과일은 보통 수십 대 일의 경쟁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들이다. 그만큼 봄에 열매솎기를 많이 한다는 말이다. 두어야 할 열매와 따버릴 열매를 구별하여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과일을 남겨두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며 무한히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요컨대 세심한 기술과 긴 노동을 견뎌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일손이 필요한 일이건만 농촌에서 남의 손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품삯은 다락같이 올랐는데도 도무지 사람을 구할 길이 없다. 갈수록 농촌인구는 줄어들고 젊은이들에게 농사라는 말은 외계어가 된 지 오래이니 앞으로 사태가 얼마나 더 악화할 지 두려운 일이다.

그나마 우리 집은 부모님과 아내까지 네 명의 노동력이 있어서 형편이 나은 편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요즘 농촌에서 희귀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시 열매솎기는 길고도 지루한 노동이다. 말없이 일에만 집중하면 더 능률이 오를 것 같지만 농사일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서로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일을 해야 힘든 줄 모르고 시간도 잘 간다. 부모님과 우리 내외는 모두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상당히 깊은 대화의 뿌리가 있다. 고향이 같다는 것은 산천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던 이들과의 기억도 공유한다는 거여서 쉬이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이 되어준다.

오늘도 그런 노동과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진한 꽃향기가 우리를 덮쳐왔다.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본 뒷산에는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만개하고 있었다. 오월에 맡는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달콤하고 싱그러운 게 또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카시아로 넘어갔다. 아카시아라는 나무는 사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산천을 망치기 위해 심었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별 쓸모도 없고 환영받지 못하는 나무다. 충청도에서는 제 이름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보통 ‘가시나무’로 불렸다. 가시가 억세기로 치면 엄나무 다음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나는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운운의 동요가 없다면 더욱 이름 없는 나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향기와 더불어 가난한 시절에 간식이 되어주었던 게 아카시아 꽃이다. 팝콘 같은 꽃을 한주먹 따서 입에 넣으면 이른 봄에 따먹던 진달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달콤한 맛이 났다. 아내는 꽃을 돌로 짓이긴 다음 노릇하게 불에 구워서 먹었다는 경험을 들려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불과 수십 년 전에 우리의 살림살이라는 게 그러했다. 세끼 밥 말고는 먹을 게 없었다. 재를 넘어 학교에 다니며 삘기를 뽑아먹고 찔레 순을 꺾고 칡을 캐고 때로는 소나무의 속껍질인 송기를 핥기도 했다. 아버지는 갈대의 새순 역시 달착지근했다는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귀농 초기, 과수원 뒷산에 무리 지어 자란 아카시아에 기대어 벌을 키운 적이 있었다. 많은 꽃 중에 아카시아는 최고의 밀원이다. 수만 마리 벌들이 꽃에서 따온 꿀을 알뜰히 빼앗는 일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정작 몇 년에 걸친 양봉을 그만둔 것은 다른 이유였다. 밖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툭하면 벌에 쏘여 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다.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던 부모님이 한창 늘어가던 벌통을 미련 없이 치우자고 했던 일도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아이들은 커서 집을 떠나고 나이 든 부모님과 함께 늙어가는 우리 내외만 적적한 과수원에서 두런두런 옛이야기를 나눈다. 스러져가는 농촌 풍경 그대로다.

햇살은 따갑고 바람이 일 때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퍼지는 날, 우리는 이제 옛이야기로도 남지 못할 마지막 농민들이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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