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2차 세계대전 당사국 간 ‘역사화해’에 시동을 걸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투하지인 일본 히로시마(廣島)를 방문키로 결정하자 일본에서 즉각 아베 총리의 진주만 답방이 부상하는 등 미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이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동맹의 전략적 접근이 양국에서는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한국과 중국 등 인근 전쟁 피해국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비판론도 적지 않다. 특히 미일 동맹의 주고받기식 화해 속에서 일본의 전범 책임이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세계평화와 핵무기감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1945년 원폭투하에 대한 사과는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지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1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이 사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잘못”이라며 “원폭투하의 시비를 따지는 것이 이번 방문의 목적이 아니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히로시마를 방문한 자리에서 핵무기 폐기를 주제로 짧은 연설을 하거나 성명을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민감한 해석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사실상 사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답방까지 거론하고 있다. 원폭투하에 대한 사과를 받았으니 태평양전쟁 도발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는 식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실제로 아베 총리가 11월 페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진주만에 들르는 일정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이날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정부로선 검토하고 있는 사실이 없다”고 일단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일 정상이 태평양전쟁을 상징하는 장소에 교차 방문함으로써 과거 전쟁의 상처를 봉합하고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대다수 미국 언론들도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등 전쟁 피해국들은 미일 동맹의 역사화해를 우려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집착했던 것은 전쟁 희생자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밖에 없다”며 “이를 계기로 일본이 면죄부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공원 인근에 위치한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비까지 찾을지도 불투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각국 정계 요인들의 히로시마 방문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아시아와 세계에 엄청난 재난을 초래했다’는 점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면서 “방문 목적이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초래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관영 신화통신도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통해) 일본은 2차 대전의 피해자로 행세하고 싶어할 것”이라며 일본의 속내를 의심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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