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3만원 이상 금지로 경제위축?
뇌물 공화국이란 반증 아닌가
취지 살려 실효성 높이는 개정 시급
20여 년 전 일이다. 취재차 만난 대검 고위간부가 대뜸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있어 걱정”이라고 혀를 찼다. 검찰이 뇌물 사건 처리에 골몰하던 때였다.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아 무혐의 처리해도 봐주기 수사란 비난이 쏟아져 곤혹스럽단 토로 끝에 한 말이다. “오고가는 정이란 게 있지 않나. 이러다 명절에 아파트 경비한테 고맙다고 주는 떡값까지 사라질 판이다.” 농담이지만 궤변이 심하다 싶어 한마디하자 그는 민망한 듯 둘러댔다. “이 기자랑은 밥 한끼도 편히 못 먹겠구먼. 미풍양속 사라진 거 맞네, 허허.”
시답잖은 옛 기억이 떠오른 건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을 두고 벌어진 ‘민생 악영향’ 논란 탓이다. ‘미풍양속’이 ‘민생’이란 그럴듯한 말로 바뀌었지만, 목적과 용도를 따지지 않고 뭉뚱그려 논점을 흐리기는 매한가지다. 국민권익위원회는 9일 공직자 등이 직무와 관련해 받아서는 안 되는 금품을 식사대접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 이상으로 정한 이 법 시행령을 입법 예고했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언론사 편집국장 간담회에서 “김영란법이 이대로 되면 우리 경제를 너무 위축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이후 금품 허용 한도가 높아지리란 예측이 나돌았으나 기대를 밑돌자(?)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3일 예정된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내대표 회동을 앞두고 “농수축산업계 피해와 관련해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민생경제가 어려운 만큼 그런 얘기도 당연히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의 미풍양속론도 등장했다. “세상이 느끼는 감정은 설과 추석 같은 때엔 농수축산물(선물)은 미풍양속 차원에서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분위기다.”(김광림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명절 선물이 진짜 미풍양속이 되려면 돈보다는 정성의 무게가 앞서야 마땅하다. 말은 “정성이야, 넣어 둬”라 해도 불온한 기대가 배어 있고 ‘주고받는 정’으로 직무 관련 서류를 뒤적여야 하는 사이라면, 금품의 무게에 반비례해 아름다움과 좋음의 무게는 0에 수렴해 갈 수밖에 없다.
우려를 쏟아내는 이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경제 사정을 들먹인다. 실제로 농수축산업계와 요식업계의 반발도 거세다. 가뜩이나 경기가 침체된 마당에 직격탄을 맞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심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자. 반부패법 시행만으로 농수축산가가 다 망하고 식당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국가경제가 휘청거리게 된다면 과연 그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노회찬 정의당 원대대표의 지적처럼 “그 정도로 지금 대한민국은 뇌물 공화국이란 말과 다름없고, 그렇다면 김영란법의 필요성이 더 커지는 것” 아닌가.
김영란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작 보완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애초 권익위가 마련한 원안은 부정청탁 금지, 금품수수 금지, 이해충돌 방지 등 세 영역으로 짜였지만, 국회 논의과정에서 부정청탁과 관련해 국회의원의 민원 전달은 예외로 뒀다. 공직자 등이 지위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이해충돌 방지 조항도 빠졌다.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까지 적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을 두고는 헌법소원이 제기된 만큼 9월 시행을 앞두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법 자체를 고쳐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어버이연합에 대한 전경련의 지원 의혹에서 드러났듯 공적 성격이 강한 시민단체도 포함해야 형평성에 맞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가별 부패인식지수가 한국은 100점 만점에 56점, OECD 가입 34개국 중 27위로 최하위권이다. 더구나 밥 한끼, 전화 한 통으로 시작돼 몸집을 키웠을 법조비리가 온 국민을 아연케 하고 있고, 세월호 참사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태까지 크고 작은 검은 거래가 얽혀 빚어낸 참극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 정치권이 진짜 민생을 생각한다면 반부패법의 취지를 살려 더 실효성 있게 보완하는 작업에 당장 나서야 한다.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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