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러, 방송인, 스포츠 해설위원, 작가, 시사평론가, 강사, 시민기자. 도무지 한 사람의 직업 같지 않지만 이 일을 모두 하고 있는 이가 있다. 자칭 ‘육체파 창조형 지식근로자’라는 프로레슬러 김남훈(42)씨다. 이미 충분히 많은 직업을 가진 그가 최근 새로운 직업을 하나 추가했다. 지난달 처세술을 다룬 일본 서적 ‘못난이를 칭찬하는 올바른 방법’(로크미디어 발행)을 우리말로 옮기며 번역가로 데뷔한 김씨를 9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못난이를 칭찬하는 올바른 방법’은 촌스러운 사람, 못생긴 여자, 대머리, 관심병 환자, 바쁜 척하는 사람 등에서 칭찬에 익숙해져 있는 미남, 미인, 패션 피플까지 다양한 타입의 사람을 칭찬하는 법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이미 10권이 넘는 책을 냈고 일간지에서 주간지, 월간지까지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했던 베테랑인 김씨는 “책에 담긴 블랙유머가 혐오발언이나 비하하는 표현으로 읽히지 않게 번역하느라 어려웠다”고 말했다.
출판사가 이 책의 번역을 김씨에게 맡기게 된 건 그가 2000년 펴낸 ‘엽기 일본어’ 때문이었다. 이 책에 담긴 유머와 위트를 기억하고 있던 편집자가 김씨를 적임자로 낙점한 것. 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활동한 적이 있는 그는 “이 책을 번역하다 보니 모든 것에 매뉴얼이 있어야 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학서적 작가에서 출발해 프로레슬러에서 번역가까지 종잡을 수 없는 삶의 궤적을 그리는 원동력은 무얼까. 김씨는 “호기심이 많은데 그 수준이 17~19세 정도에 멈춰 있어서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도전이란 거창한 표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회계 장부에서 차변과 대변을 대조하는 것처럼 저도 호기심으로 생기는 불편함과 호기심 덕에 찾게 되는 성취를 대조합니다. 늘 성취감이 더 크니까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계속 뛰어들게 되는 거겠죠.”
현재의 김씨를 만든 호기심의 시작은 책과 오토바이였다.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몰던 오토바이에 마음을 빼앗긴 뒤 오토바이 정보를 찾아 헤매다 일본 잡지를 사 모았다. 즐겨 읽던 고대 신화 속 영웅 판타지를 링 위에서 발견하곤 프로레슬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일본어도 글쓰기도 프로레슬링도 모두 대학에 진학한 뒤 시작했다.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일본어를 공부하니 그림만 보던 오토바이 잡지의 글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프로레슬링도 몸으로 부딪혀 공부해보니 실력이 늘더군요.”
김씨가 프로레슬링을 유독 좋아하는 건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가 결합한 거의 유일한 장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체력이 동시에 필요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관객이 상상한 것 이상의 쾌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르”라고 믿는다. “야구로 치면 9회말 투아웃 만루홈런 상황을 선수들이 노력하면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조작이 아니라 노력으로요.”
2000년 프로레슬러로 데뷔해 악당 역할로 맹활약하던 그는 2005년 부상으로 몇 달간 하반신이 마비되는 아찔한 경험을 한 적도 했다. 회복 후 일본 무대로 진출해 한국 프로레슬러로선 처음으로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전문지식과 빼어난 말재주로 2008년 미국 이종 종합격투기 대회 UFC 해설위원으로 데뷔했고 현재는 미국 프로레슬링 WWE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가 지났지만 여전히 현역 선수로도 뛰고 있는 그는 “육체적으로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프로레슬러가 내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기 때문에 당분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포츠맨으로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최근 고민상담에 관한 책을 하나 탈고했고 현재는 청소년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꼰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는 어린 친구들이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스마트폰에 중독된 못난이를 칭찬하는 방법’을 물었다. “아, 어렵네요. 이렇게 말해주면 어떨까요. 당신은 얼리어답터시네요. 얼리어답터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글 쓰는 재주도 많대요. 글을 한번 써보시는 게 어떨까요.”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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