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분단 이후 첫 남북총리회담... 강영훈 전 총리 별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분단 이후 첫 남북총리회담... 강영훈 전 총리 별세

입력
2016.05.11 14:08
0 0

제21대 국무총리를 지내며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한 강영훈 전 총리가 10일 오후 3시 7분쯤 입원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4세.

군 출신으로 5ㆍ16 군사정변에 동참하지 않아 옥고를 치렀고 노태우 정부 총리 시절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총리회담을 갖는 등 고인은 군인, 외교관, 국회의원, 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두루 역임하며 여러 족적을 남겼다.

1922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만주 건국대를 다니다가 학병으로 징집됐고 광복 후 육군에 복무해 6ㆍ25 전쟁 때 육군 제3군단 부군단장 등으로 참전했다. 고인은 1961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임시 5ㆍ16 군사정변이 발발했을 때 박정희 소장 등이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 행진을 요청하자 “생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육사 교관은 교장의 반대에도 육사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벌였다. 고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혁명죄로 수감돼 강제 예편됐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외교안보 분야 연구를 하다 1978년 귀국해 외교안보연구원장을 맡았다. 이어 영국대사와 로마교황청 대사 등을 역임하며 외교관 생활을 하다 1988년 제13대 국회에서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발탁돼 금배지를 달았다.

고인은 이어 같은 해 말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돼 1990년 말까지 2년가량 재임했다. 특히 1989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북측 연형묵 총리와 남북총리회담(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을 가졌고 10월에는 우리 총리로는 처음 북한 평양을 방문해 2차 회담 후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이 회담은 이후 1991년말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이란 결실을 맺었다.

고인은 또 잦은 교체나 대독 총리 등으로 부침이 많았던 역대 총리들 사이에서 외유내강형으로 총리직을 수행한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한 사람”으로 강영훈ㆍ이회창 전 총리를 꼽았다.

정·관계를 떠난 강 전 총리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7년 동안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아 대북 지원사업을 이끌었다. 또 1993년에는 엑스포지원중앙협의회 회장과 대한에이즈협회 초대회장, 1994년 한국자원봉사단체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96∼2009년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 총재를 맡는 등 고령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부인 김효수씨와 사이에 아들 성용ㆍ효영씨, 딸 혜연씨 등 2남 1녀를 뒀다.

장례는 대한적십자사 김성주 총재, 정원식 전 총재,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사회장(葬)으로 진행된다. 14일 오전 9시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열리며,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 장지는 국가유공자 제3묘역이다.

송용창 기자 hermee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