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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전승과 굴복 사이

입력
2016.05.1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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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방식의 쪽염색을 해 미려한 청색을 자랑하는 드레스. 45R 홈페이지
전통방식의 쪽염색을 해 미려한 청색을 자랑하는 드레스. 45R 홈페이지

45R이란 패션 브랜드가 있다. 이 브랜드의 수석디자이너이자 공동 설립자는 올해 예순 두 살의 나이인 이노우에 야스미다. 그녀는 전통 기모노 장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침선장들은 인형 옷을 만들라며 천 조각을 손에 쥐어주곤 했다. 그녀는 이런 유년의 기억을 통해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든 직물의 힘에 푹 빠지게 되었다.

45R 브랜드의 핵심 철학은 ‘소재 우선’ 이다. 기존 패션 브랜드가 제품 생산을 디자인 콘셉트를 설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반면 45R은 철저하게 소재의 가치를 개발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특히 데님 원단을 일본의 전통적 쪽염색 방식을 이용해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 에도시대부터 일본의 귀족과 사무라이들이 사용한 쪽염은 방염 효과로 희소가치를 누렸다.

45R에서는 현재 일본 내에 생존해있는 쪽염색 장인 5인 중 한 명의 지도하에 1년에 걸쳐 쪽염색을 시행한다. 특히 실 한 가닥 한 가닥을 손으로 일일이 염색하는 선염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직물을 짠 후 통으로 염색하는 것과 달리 풍성하며 미려한 색감을 낸다고 한다.

45R 브랜드는 이 방식으로 22가지의 독창적인 청색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 청색은 시간과 지리적 제약을 넘는 보편적인 색상이며 데님은 세탁할 때마다 조금씩 색이 바래면서 세월의 결속에 고색창연함을 남긴다. 이는 한 개인의 개성의 확장으로 연결된다. 전통기술을 이용하여 개인의 개성을 창조하는 일과 연결시키되 반드시 한정판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이 브랜드의 성공 비결이다.

45R의 디자인 팀이 하나의 제품을 매장까지 제품화하여 전달하는 데만 1년이 걸린다. 자연의 빛깔과 전통에 근거한 미학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쪽염색이 발달한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은 전통 방식의 쪽염색을 관광자원으로 잘 육성해냈다. 이 과정에서 재팬블루라는 청색을 개발, 수출하고 있다.

한국에선 나주지역이 영산강과 바닷물이 합류하는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벼의 대체작물로 쪽풀을 심으면서 쪽염색이 발달했다. 아쉽게도 현재 나주지역은 소규모 공방을 중심으로 상품 개발과 전통 전승에 애쓰고 있지만 그 효과가 산업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관 위주의 ‘전통 프로젝트’들이 이벤트성에 그치며, 그저 필요할 때만 ‘전통’을 불러내서 과도하게 소비해온 게 가장 큰 이유다.

기업에서 이벤트 성으로 선보이는 한류 패션 프로젝트엔 너무 많은 걸 한방에 녹여내려는 욕심만 가득해서 ‘특화’란 단어가 무색한 제품들이 시제품으로 나온다.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의 자국 문화 활용도를 보면 프랑스가 15.8%, 일본이 10%, 이탈리아가 8%인데 한국은 무려 32.8%다. 우리는 전통에서 기인한 인습적 요소들을 자각 없이 사용해왔고, 이 과정에서 예술의 개성적 창조와 표현이 가진 내적인 필연성도 잃어버렸다.

한 나라의 패션 문화도 전통의 기반 위에서 추진력을 얻는다. 전통을 뜻하는 라틴어에는 ‘전승’의 의미와 함께 ‘굴복’의 의미가 함께 있다. 선대의 성취를 그대로 전달하는데 그칠 때, 후대는 선대에게 굴복 당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전통 문화를 가리켜 ‘아득히 먼 옛날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본원적 실체라기보다 현재에서 선택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디자인을 모방하는 데는 빠르면서도 생산의 토대가 되는 소재 개발에는 미적거린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결에서 걸러낸 미세한 색조는 작품 제작의 강력한 토대가 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숙성한 탓에 다양한 변수를 만들 수 있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전통 부활 프로젝트’도 이런 성격을 띠면 좋겠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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