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시대인 2002년 7월 북한이 발표한 ‘7ㆍ1 경제관리개선조치’(7ㆍ1조치)는 개혁ㆍ개방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한껏 드높였다. 물가ㆍ임금 현실화를 통한 가격개혁, 공장ㆍ기업소의 자율성 확대, 개인경작지 확대 및 실험적 개인영농제 실시 등이 이 조치의 핵심이었다. 1년 뒤에는 비공식적으로 운영돼 온 장마당을 종합시장으로 공식화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개방 초기 단계와 비슷한 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이라고도 볼 만했다. 6ㆍ15 남북정상회담 후 활발해진 남북교류도 좋은 배경이었다.
▦ 이 조치의 밑그림을 그리고 시행을 주도한 인물이 이번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핵심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합류한 박봉주 내각총리다. 7ㆍ1조치 발표 당시 화학공업상이던 그는 1년 후인 2003년 4월 내각총리로 발탁돼 시장활성화, 협동농장 개혁 등 경제개혁의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계획경제 틀 내에서의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고 당과 군부 보수 강경파의 반대와 저항도 심했다. 결국 김정일이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는 2007년 실각하고 평남 순천비날론사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 그 후 북한의 경제개혁은 급속히 후퇴했고, 그 정점이 화폐개혁이었다. 인민생활이 급속히 어려워지는 등 큰 혼란이 발생했다. 북한 경제가 일정부분 시장경제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유지되기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결국 화폐개혁을 주도한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에게 책임을 지워 처형하고 다시 시장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좌천된 박봉주가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전격 복권되고 이어 2012년 경공업부장으로 승진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 2013년 4월 박봉주는 6년 만에 다시 내각총리에 임명됐다. 김정은 체제 아래서 권력실세들의 부침이 심했지만 박봉주 총리의 지위는 굳건했다. 그만큼 김정은의 신뢰가 깊다는 뜻이다. 그는 2002년 장성택 등과 함께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방남해 산업시설을 둘러봤고, 중국과 동남아 방문 경험도 있다. 북한에서 가장 개혁적 테크노크라트라는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건 경제강국 건설을 위한 경제발전 5개년 전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핵ㆍ경제 병진노선 고수 속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걸어본다.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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