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말카냥 대통령궁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다바오시장을 새 주인으로 선택했다. 필리핀 유권자들이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두테르테 시장을 새로운 지도자로 뽑은 것은 정치 변혁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보수화된 필리핀 정가의 부패와 만연한 범죄를 잠재우고 지방 분권과 재분배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이지만, 치안 강화를 핑계로 새로운 독재정권을 수립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두테르테 시장은 과격한 화법과 막말 논란 때문에 ‘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린다. 2015년 말에는 연초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닐라 방문 때 그를 모욕한 사실이 발견되자 교황에게 편지까지 보내며 사과했다. 올해 4월 유세 도중에는 1989년 납치된 후 강간 살해당한 호주 전도사를 향한 모욕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두테르테 시장은 항의하는 호주 대사에게 오히려 “대선 중이니 내정간섭하지 말라”고 반격했다.
그럼에도 필리핀 국민은 9일 치러진 대선에서 변화를 상징하는 두테르테 시장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마르코스ㆍ아키노ㆍ로하스 가문 등 소수 명문 가문들이 이끌어 온 필리핀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남부의 유력한 시장 출신 후보에게서 변화의 기운을 느꼈다”고 분석했다. 두테르테 시장 역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지원으로 성장한 토호 가문 출신이지만 오늘날 중앙 정가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두테르테 시장의 ‘범죄ㆍ부패 일소’ 공약도 유권자를 자극했다. 그는 “취임 6개월 이내 범죄를 없애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88년부터 20년 이상 다바오시장직을 맡아온 그는 사조직 암살 단체를 결성해 다바오시의 조직폭력단과 마약상 등 1,700여명을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다바오시는 ‘클린시티’가 됐다는 분석도 없지 않지만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미국 마블 코믹스의 등장인물 ‘퍼니셔’(Punisherㆍ징벌자)에 비유하며 법치의 무시를 부각시켰다.
베니그노 아키노 정권이 경제성장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익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도 두테르테의 당선 요인으로 지목된다. 아키노 대통령은 경제 개혁으로 임기 동안 연평균 6%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수도 마닐라 외 지방 거주자들과 노동자들의 가난을 구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때문에 가난한 유권자들은 지역 균형발전과 노동자ㆍ농민을 위한 지원책을 강조하는 두테르테 시장의 대중주의 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두테르테 선거본부는 대선 승리가 확실시되자 “내각제와 연방제 도입을 통한 지방분권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그가 추구해 온 평등한 지역개발 정책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해외 언론들은 두테르테 시장의 치안 강화 정책에 인권 침해요소가 있고, 정치적 반대파 탄압과 독재 권력 수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고 보고 있다. 두테르테 시장은 “부패한 정치인들이 나를 막는다면 계엄령을 선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발언에서 72년 계엄령을 선포한 뒤 14년간 독재 권력을 휘두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모습이 연상된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일본에 밀착해 중국을 견제해 온 필리핀의 외교정책노선에도 변화의 기미가 감지된다. 두테르테 시장은 당선 직후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南沙)군도ㆍ필리핀명 카라얀군도) 분쟁을 두고 중국과 일대일 협상을 벌일 수도 있다고 선언했다. 2014년 필리핀 내 8개 부지를 미군 주둔지로 제공한다는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에 대해서는 “필리핀이 일방적으로 손해만 본다”며 재검토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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