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크로아티아에서 한 커플이 헤어졌다. 관계는 끝났지만 물건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 옛 연인의 체취가 그대로 밴 물건을 계속 사용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들은 물건을 처치하는 방법으로 전시를 택했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실연박물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를 기증하고 이를 모아 보여준다는 독특한 컨셉트를 가진 ‘실연박물관’ 전시가 5일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에서 막을 올렸다. 크로아티아에서 시작해 전세계 35개 도시를 순회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전시로, 국내 소개는 처음이다.
실연박물관의 시작이 그러했듯, 전시의 중요한 테마는 연인과의 이별이다. 목을 축 늘어뜨린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커다란 곰 인형부터 아까워서 차마 먹지 못했던 사탕 등 연인과 한번쯤 주고 받았을 법한 물건들을 보고 관람객은 각자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다. 둘 사이 내밀한 이야기가 적힌 다이어리도 눈길을 끈다. 기증자는 “차마 쓰레기통에 집어넣거나 폐기할 수 없어서 이사를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도 계속 책상 서랍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다이어리를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묵은 마음도 함께 놓아주고 싶다”고 했다. 잊을 만하면 다이어리를 꺼내보며 스스로를 괴롭혔다는 그는 헤어진 지 6년 만에야 옛 연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진정한 이별을 위한 의식으로, 새로운 시작을 향한 열망으로 물건들은 실연박물관에 보내진 것이다.
한국에서 받은 기증품들은 가족과의 사연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 기증자는 7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박물관으로 보냈다. 남편과의 추억이, 남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낡은 자동차를 앞마당에 세워두고 바라만 보던 부인은 “당신 이대로 밖에 더 오래 서 있으면 더 상하겠어요”라며 어렵게 기증을 결심했다. “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게요”라는 그녀의 편지는 어떤 물건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대변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29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들이 선물한 스피커를 어렵게 내놓은 기증자도 있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스피커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던 (아들의)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며 “아들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인근 성당의 종을 하루 세 번씩 치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묻어 오는 절절함이 관람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러나 헤어짐이 반드시 슬픔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번 전시를 총괄한 아라리오뮤지엄 류정화 부디렉터는 “세계 도처에서 기증받은 물품들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며 “전시를 하면 할수록 지평이 넓어지는 요술 같은 전시”라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전시를 기획한 기획자 드라젠 그루비시치와 올링카 비스티카도 제주를 찾아 “관계가 깨어지면 ‘나는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며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별에 대한 전시지만 역설적으로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실연박물관’은 9월 25일까지 계속된다. 이후 기증품과 사연은 모두 크로아티아 상설박물관으로 옮겨 소장된다.
제주=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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