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 오바마(18)가 하버드대 진학을 1년 미루고 갭 이어를 갖는다고 한다. 갭 이어는 고교 졸업생이 대학 진학에 앞서 한 학기 또는 1년 간 여행을 하거나 봉사 활동ㆍ인턴 등 사회경험을 쌓으며 진로를 모색하는 기간. 유럽에선 일반화한 제도지만, 미국의 경우 2000년대 들어 하버드대 예일대 등 아이비리그를 중심으로 도입됐다. 입학은 보장하되 등록시기를 1년 뒤로 유예해 준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이 1년 간 해외에서 갭 이어를 보내고 대학에 입학한 걸 미국 명문대들이 주목했다고 한다.
▦ 갭 이어의 시초는 400년 전 영국 귀족가문 자제들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 당시 유럽문화의 변방이던 영국의 귀족들은 자녀를 고전문화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2~3년씩 장기여행을 보냈다. 대개 가정교사 두 명이 수행원으로 동행했는데, 한 명은 수학 역사 등 학문을 가르쳤고 한 명은 승마 펜싱 등을 담당했다. 그랜드 투어는 유럽 각국의 귀족들이 공통의 행동 규범과 미적 감각을 갖게 되는 계기였으나, 19세기 증기선과 기차의 등장으로 여행이 대중화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 영국 젊은 귀족의 그랜드 투어 비용은 연간 3,000~4,000파운드(20만 달러 이상). 귀족 계급은 막대한 비용을 대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하고 농민을 수탈했다. 미국 전체 고교 졸업생 중 갭 이어를 택한 학생은 약 3만3,000명. 전체 고교 졸업생의 1% 미만이다. 부모가 대는 비용이 많게는 4만 달러에 달한다. 갭 이어 참여 학생들이 학업 성취도가 더 뛰어나고 진로와 전공 선택에도 주관이 뚜렷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대학들은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 갭 이어 제도가 절실한 건 한국이다. 국내에선 갭 이어가 사회 초년생들이 퇴사 후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잠시 갖는 휴식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대학입시와 취업에 이르기까지 부모 기대에 맞춰 스펙 쌓기에만 몰두해 온 젊은이들이 막상 사회에 진출한 뒤에야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갖는 셈이다. 우리 대학도 학생들이 재정적 어려움 없이 갭 이어를 보낼 수 있도록 제도화하면 어떨까. 학업과 인생의 비전을 스스로 설계할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고 20대를 보내는 건 너무 불행하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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