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60% 개표서 당선 확실
범죄와의 전쟁 앞세워 표심 얻어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도 부통령 선거서 당성 유력

9일(현지시간) 치러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필리핀의 트럼프’로 알려진 로드리고 두테르테(71) 다바오시 시장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두테르테 시장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보다 험악한 말로 유명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을 앞세워 경제난과 범죄,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필리핀 국민들의 표심을 얻었다는 분석이다.
현지 ABS-CBN 방송은 9일(현지시간) 오후 8시 현재 유권자 5,436만명을 대상으로 치러진 대선에서 야당 PDP라반의 두테르테 시장이 1,045만표를 얻은 것으로 비공식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무소속의 그레이스 포(47) 여성 상원의원은 595만 표, 집권 자유당(LP)의 마누엘 로하스(58) 전 내무장관은 580만 표를 기록했다. 약 60%의 개표가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두테르테 시장의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다. 그레이스 포 의원도 두테르테 시장의 당선이 기정사실화되자 “당선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검찰 출신인 두테르테 시장은 우범지역인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에서 22년(7선) 동안 시장을 역임하며 ‘징벌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치안을 확고히 확립해 인기를 얻었다. 그는 대선 출마 선언에서 “취임 후 6개월 내 모든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밝혀 범죄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기성 정치권에 실망한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공무원인 코르도비스 니뇨는 이날 두테르테에게 투표한 후 “범죄를 소탕하고 필리핀을 발전시키는데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두테르테 시장의 전력을 문제 삼으며 그의 당선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두테르테 시장은 다바오시에서 범죄자 약 1,700명을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등 공권력을 초법적으로 남용해 인권단체의 반발을 샀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강압정치가 부활할 것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그는 1989년 교도소 폭동 당시 집단 성폭행을 당해 숨진 호주 여성 선교사에 대해“시장인 내가 먼저 (성폭행)했어야 했는데”라고 발언하는 등 잇따른 여성과 인종 비하 발언으로 대통령 자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날 함께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는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58) 상원의원이 968만 표를 얻어 레니 로브레도(52) 여성 하원의원(876만 표)을 앞서고 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21년 동안 독재통치를 하며 민주화 인사를 살해, 고문하고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주니어 의원은 아버지의 과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 시절을 ‘필리핀의 황금시대’로 부르며 향수를 자극해 왔다.
가난과 범죄 기승 등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두테르테 시장과 마르코스 주니어에 대한 지지 원인으로 분석된다. 다만 사법 체계와 인권을 경시하는 두 후보가 나란히 정ㆍ부통령이 되면 ‘독재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일 것으로 보인다. 당장 찬반 세력간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정국이 긴장되는 것은 물론 정권 인수 과정에서 진통도 예상된다.
이날 선거에서는 정ㆍ부통령 선거와 상원의원 12명, 하원의원 297명, 주지사 81명 등 1만8,000여명의 공직자와 의원에 대한 선거가 동시에 치러졌다. 최종 선거결과는 이르면 10일 오후에 발표될 예정이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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