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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누가 트럼프를 낳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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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누가 트럼프를 낳았나

입력
2016.05.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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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출신의 억만장자 사업가 로스 페로가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1992년 미국 대선은 기성 정당에게는 악몽 같은 해였다. 대선을 불과 10개월 앞두고 출마를 선언한 그는 한때 조지 H 부시(공화당)와 빌 클린턴(민주당) 후보를 압도했다. 후보 사퇴와 번복이라는 돌출 행동이 없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초반 부시에 끌려가던 클린턴이 승리한 데는 페로 돌풍에 대한 반사이익이 적지 않았다. 클린턴 정부가 미국의 쌍둥이 적자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도 그의 주장을 수용한 덕이 컸다.

▦ 페로는 양당체제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감을 철저히 대변했다. 부시 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을 “컨트리클럽 멤버”라며 서민의 적으로 몰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무효화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서는 이미 “거대한 굉음을 내며 미국의 일자리가 멕시코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고 성토했다. 최근 사기혐의로 피소된 트럼프처럼 사업적으로 전혀 윤리적이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와 경제를 낡은 자동차 엔진에 비유하며 수리공을 자처한 그에게 유권자들은 박수를 보냈다.

▦ 92년 대선을 ‘양당체제 종식의 원년’이라고 한 학계의 평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 대선에서 두 당은 끊임없이 유권자들의 불신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보수화, 계급화하는 모습을 두고 양당제의 시늉을 한 일당제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40%를 넘었던 의회 신뢰도는 지난해 10% 밑으로 떨어졌다. 탈 이념, 중도주의도 득세했다. 당적을 바꾸고, 낙태ㆍ총기 규제에서 오락가락하는 트럼프의 회색적 이념은 더 이상 화제도, 문제도 되지 않는다.

▦ 트럼프는 동맹국에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고 하고,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발목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 버니 샌더스는 월가를 해체하고, 대학등록금을 무상화하겠다고 공언한다. 이런 과격한 주장이 통하는 이유는 한 가지, 기성 정당이 자신을 위해 아무 일도 해주지 않는다는 배신감 때문이다. 2012년 대선에서 교사의 자질과 처우가 문제가 됐을 때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썼다. “민주당은 무능한 교사를 욕하면서 노조를 의식해 해고에 주저하고, 공화당은 새 바람이 필요하다면서 증세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처우개선에는 눈을 감는다.” 자업자득이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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