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 사기, 명예훼손 많아
아니면 말고식 무분별 민원 골치
신고 규정 세분화, 법령 정비 나서
지난달 한 30대 남성이 온라인 명예훼손을 조사해 달라며 26건의 고소장을 들고 서울 A경찰서를 찾아왔다. 이 남성은 앞서 주소지 근처 경찰서에 명예훼손죄로 300여건을 신고했으나 “너무 많아 모두 조사하기 힘들다”는 말에 서울과 경기 일대 15개 경찰서에 고소장을 나눠 접수한 것이다. A서 사이버범죄수사팀장은 8일 “고소장을 검토한 결과 가벼운 욕설이나 빈정거림이 대부분이었다”며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고소장이 접수된 이상 사실관계를 파악하느라 지금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기술의 발달로 사이버 모욕과 사기, 음란물 유통 등 온라인 기반 범죄가 늘면서 이와 관련한 고소ㆍ고발도 급증하고 있다. 신고가 쉽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사이버 분쟁의 특성상 수사해야 할 대상은 방대한데, 합의금을 노린 무분별한 고소까지 잇따라 경찰의 수사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이버 명예훼손과 모욕은 법망의 허점을 이용한 대표적 악성 민원으로 꼽힌다. 모욕죄가 성립되려면 제3자가 욕설을 인지하는 ‘공연성’과 피해자 신분이 드러나는 ‘특정성’이 구비돼야 하는데, 게임사이트 등에서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 정보를 공개해 타인의 불법을 유도할 때가 많다. 합의금이 많게는 100만원을 웃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욕죄 고소는 온라인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퍼져나가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1년 5,712건이었던 사이버 명예훼손 및 모욕 신고건수는 지난해 1만5,043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경찰 사이버범죄수사팀에서 가장 많이 처리한 범죄 유형은 중고물품 거래를 다루는 인터넷사기(6만8,444건)였다. 통상 피해 금액은 소액이지만 연루된 피해자는 수백명에 달하곤 한다. 한 수사관은 “사이버범죄는 경찰청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신고가 가능해 ‘아니면 말고’ 식의 민원이 부지기수”라며 “3,000원을 떼였다며 집단 민원을 넣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찰 내부에서 사건 관할 경계가 모호해 혼란이 가중되기도 한다. 올해 초 서울 B경찰서에 공인인증서와 신용카드가 불법 복제됐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간 신용카드 도용은 경제팀에서, 카드 복제는 지능범죄수사팀이 주로 맡아왔으나 컴퓨터에 저장된 공인인증서도 복제됐다는 이유로 결국 사이버범죄수사팀 손에 넘겨졌다. 담당 수사관은 “지금까지 현금지급기(ATM) 위에 두고 간 현금을 가져가면 절도나 점유이탈물횡령 혐의가 적용돼 형사과에서 사건을 담당했는데 ATM기가 단지 전자기기란 이유로 사이버팀에서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털어놨다.
경찰 관계자는 “‘지구상의 모든 음란물을 없애달라’는 황당 민원이 버젓이 접수될 만큼 현행 수사 체계로는 폭증하는 사이버범죄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신고 규정 세분화 및 법령 정비를 통해 수사력 낭비를 줄이고 해킹이나 피싱 등 첨단 범죄에 대한 대응 능력을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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