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담긴 시대적 의미 발견위해 노력”
“창작의 열기나 양적인 면에서 이 땅은 여전히 시의 나라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숙한 자본주의 하에서도 그와 무관한 시의 생산이 전혀 위축되지 않는 것을 보면 기현상으로 보일 정도예요. 덕분에 시 평론가로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혜원(50)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인터뷰 내내 제27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 선정이 의외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팔봉비평상이 제정된 1990년 이래 세 번째로 배출된 여성 수상자다. 수상작 ‘지상의 천사’(천년의시작)는 1991년부터 평론 활동을 시작해 25년 간 꾸준히 한국 현대시를 비평하고 연구해온 이씨의 열 번째 책이자 8년 만에 나온 시 평론집이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쓴 글을 추린 이 책에서 이씨는 시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본질적인 질문을 특유의 첨예한 시선으로 살핀다. 시간과 관련된 시인들의 다양한 감각과 상상을 짚어내고 필생의 시업(詩業)을 통해 시인들이 도달한 독자적 경지를 추적하는 그의 시도에서 한국 시에 대한 지긋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씨의 시평은 “또박또박 읽는다”는 심사위원단의 평가처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단정함이 특징이다. 시보다 더 멀리 뻗어가거나 시의 일부를 골라 천착하지 않고, 한 줄 한 줄 성실하게 밀착해 의미를 읽어내는 모습이 영락 없는 모범생이다. 손택수의 시 ‘좌선’에 붙인 평론을 보자.
“바람 한 점 없는 유리곽 속/ 몸속에서 일으킨 바람이 속살과 거죽 사이로 불어 가/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게 틈을 벌리는 시간/ 제가 제 살을 뜨는 시간/ 침이 꼴깍 넘어가는 눈 앞의 먹이도/ 방해할 수 없는 좌선” (‘좌선’ 일부)
“시인의 시선은 파충류관의 유리곽 속에서 한창 탈각 중인 도마뱀에 고정되어 있다. 눈 한 번 꿈쩍이지 않고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도마뱀의 자세는 선방의 좌선을 연상시킨다.(…)이 시는 도마뱀의 탈각에 대한 극도로 정밀한 관찰에서 삶과 죽음이 전환되는 순간에 대한 생생한 존재론적 통찰을 이끌어내는 시적 발견을 보여 준다.”
등단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이어져온 이씨의 시 읽기는,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최근 미세한 변화를 겪고 있다. 책 맨 앞에 배치한 김수영 시론은 그 전조다. 그는 2000년대 한국 시의 주요 화두를 ‘미래파’ 논쟁과 뒤이어 등장한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로 정리하며, 그 이후 시의 나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험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의 계열을 잇는 미래파의 유행 이후에 문학과 현실의 관련성을 중시하는 리얼리즘 계열의 논의가 따라오는 것은 우리 시사에서 계속 반복돼온 일입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도 변화에 큰 몫을 했다고 보는데, 이후 김행숙 등 미래파에 속한 시인들이 현실에 큰 폭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지요. 시의 미학적 요구를 잃지 않으면서 정치와 윤리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김수영의 시가 어떤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교수는 비평이 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젊어서부터 시는 꼼꼼하게 읽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시가 시대의 반영이란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아요. 시인들이 미처 인식하고 쓰지 못했더라도 그 안에 담긴 시대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지금 비평가들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이혜원 교수는
▦1966년 강원 양양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 ‘현대시의 욕망과 이미지’ ‘세기말의 꿈과 문학’ ‘현대시 깊이 읽기’ ‘현대시와 비평의 풍경’ ‘적막의 모험’ ‘생명의 거미줄-현대시와 에코페미니즘’ ‘자유를 향한 자유의 시학-김승희론’ ‘현대시 운율과 형식의 미학’ ‘현대시의 윤리와 생명의식’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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