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 英본사 다시 찾은 김덕종씨
검찰 수사ㆍ불매운동 등 이슈되자
문전박대했던 태도는 변화
카푸어 대표와 면담 성사됐지만
국내서 발표한 보상안만 되풀이
“런던 시민 아픔 공유 고맙기만”
주총서 항의 서한 접한 주주들
“매우 심각한 문제” 관심 표명
지난 5일 오전(현지시간) 영국 런던 캐번디시 광장에 '내 아이를 살려내라!'라고 쓰인 노란색 조끼를 입은 한국인 남성이 섰다. 그는 서툰 영어로 "레킷벤키저는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책임지라"고 울부짖었다. 어린이날 가족과 함께 하는 대신 구만리 타국에서 목이 쉬도록 가두시위를 벌였던 사람은 7년 전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썼다가 아들을 잃은 소방서 구급대원 김덕종(40)씨. 그런 김씨는 6일 오전 가까스로 옥시 영국 본사의 라케시 카푸어 레킷벤키저 대표까지 만났지만, 진정한 사과 대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다국적기업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김씨는 지난 4일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과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캐번디시 광장 인근에서 열리는 레킷벤키저 본사 연례 주주총회장에서 국내 가습기 살균제 피해 참상을 알리고, 레킷벤키저의 사과와 후속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꼭 1년 전인 지난해 5월에도 같은 이유로 런던을 찾았다. 이번 방문 초기엔 1년새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 기대도 컸다. 6일 카푸어 대표 면담 직전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김씨는 "우리를 문전박대 했던 레킷벤키저가 이제는 먼저 대표와의 면담을 제안해 왔다"며 "한국 검찰이 영국 본사 수사를 염두에 두고, 소비자들이 대규모 불매운동을 추진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씨 방문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1년 전에도 아내는 "그날의 아픔이 되살아 난다"며 영국행을 만류했다. 김씨는 "우리 사회의 관심이 최고로 모인 지금이 문제 해결의 적기라고 생각해 주변을 설득했다”며 “하루에 잠도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고된 일정이지만 믿고 지지해 준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북 칠곡소방서에서 구급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교대근무 탓에 장기 휴가를 내는 일도 눈치 보였는데 흔쾌히 배려해준 동료들이 고맙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영국 방문 사흘 만에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왔다. 김씨 등은 이날 오전 런던 근교 슬라우시에 있는 레킷벤키저 본사를 찾아 카푸어 대표를 40분간 면담했다. 카푸어 대표는 면담에서 '옥시 제품이 한국인에게 끼친 고통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며 너무 유감스럽다'는 내용의 공식 입장문을 읽었다. 그러면서 지난 한국 정부 조사에서 폐손상 인과관계 가능성이 높게 판정된 1, 2단계 피해자들 중심으로 '포괄적 보상안'을 마련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인도적 기금을 마련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지난 2일 국내 기자회견에서 옥시가 발표한 수준 그대로였다. 김씨는 면담 직후 "5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데는 5분도 안 걸렸다. 40여분 동안 진정성이 담긴 사과 표현은 한 번도 없었다. 다국적기업이 한국민에 대해 가진 입장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고 울분을 토했다.
앞서 5일 열린 레킷벤키저 주주총회에선 한국 피해자들의 항의서한을 주주들에게 전달했다. 총회 시작과 동시에 의장은 주주 100여명 앞에서 영국 본사의 공개사과, 완전하고 충분한 보상대책 마련 등 피해자들의 5대 요구사항이 담긴 서한문을 읽었다. 최 소장은 “라케시 대표와 면담 결과 우리의 첫 번째 요구가 묵살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현지 외신들이 방문단에 주목한 것이 그나마 성과였다. 이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레킷벤키저의 최고경영자가 한국에 살균제 문제를 사과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총회에 참석한 카푸어 대표가 '대단히 유감스럽다. 개인적으로 매우 죄송하다'고 사과한 내용을 보도했다. 일간 텔레그래프도 최근 한국 소비자 사이에서 불고 있는 옥시 제품 불매운동 사진을 게재하며 사안을 비중 있게 다뤘다.
영국 시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평가할 만 했다. 5일 오전 주주총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일부 주주들은 근처에서 집회를 하던 김씨 등에게 다가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매우 심각한 문제다"라고 관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거리를 지나던 런던 시민들이 김씨의 설명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김씨는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해줘서 놀랍고, 고마웠다"며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이제 국제사회의 이슈"라고 말했다.
김씨 일행은 카푸어 대표와의 면담 직후 런던으로 돌아와 레킷벤키저 이사진을 영국 검찰에 고발하는 법률적 자문을 형사사건 전문 영국 변호사에게 받기도 했다. 8일에는 세퓨 가습기 살균제 원료인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만든 케톡스사를 방문하기 위해 덴마크로 이동한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김씨는 7일 오전 런던의 명소인 관람차 '런던아이'도 방문할 생각이다. 이날은 김씨의 아들 고 승준(사망 당시 5세)군의 7번째 기일. 생전 승준이는 풍선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둥근 풍선을 닮은 관람차를 보면서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문제 해결의 작은 실마리라도 들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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