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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어떻게 끝맺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입력
2016.05.07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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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 윌슨은 성년 이후 생의 절반은 피임ㆍ낙태의 권리를 위해, 남은 절반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바쳤다. 그는 무엇으로도 억압할 수 없고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 될 개인의 권리 안에 저 둘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국가와 종교와 공동체의 법과 교리와 관습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다. 유튜브.
리비 윌슨은 성년 이후 생의 절반은 피임ㆍ낙태의 권리를 위해, 남은 절반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바쳤다. 그는 무엇으로도 억압할 수 없고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 될 개인의 권리 안에 저 둘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국가와 종교와 공동체의 법과 교리와 관습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다. 유튜브.

리비 윌슨은 1977년 남편 그레이엄을 위암으로 잃었다. 의료진 처방대로 갖은 항암치료를 다 했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어느 날 의사는 ‘브롬프톤 칵테일(brompton cocktail)’을 처방했다. 헤로인 코카인 에틸알코올을 섞은 강력 진통제. 그들도 의사였고, 그 처방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진통제를 거부했다. 죽음이 임박해지면 의식도 반의식-무의식으로 사라져갈 테지만, 통증 잡자고 숨도 멎기 전에 약으로 의식을 잃지는 않겠다는 거였다. 그는 위스키, 탄산수, 차만 마시겠다고 했고, 리비는 그 뜻을 존중했다. 그레이엄은 만 2주를 버티고 숨졌고, 리비는 그 과정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1960년대부터 미혼여성 피임 클리닉을 열어 여성들의 피임ㆍ낙태 권리를 위해 살아온 리비였다. 59세의 남편을 떠나 보낸 51세의 리비는 남은 생을 불치ㆍ말기 환자의 스스로 죽을 권리와 조력자살 합법화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두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은 거였다. 국가와 사회의 억압과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지키는 일. 피임ㆍ낙태가 생명의 선택권이라면 존엄사는 죽음의 권리였다. 그에겐 둘 다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권리였다.

지난 2월 말, 리비는 말기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준비한 건 ‘자살 봉지(suicide bag, exit bag)’라 불리는, 헬륨 키트였다. 농축 헬륨가스와 비닐봉지, 그리고 봉지를 밀폐시키는 데 쓰는 벨크로 밴드. 89세의 그는 항암치료를 마다하고 그 길로 퇴원했다. 병원을 나서며 어쩌면 그는, 더불어 늙어가는 자식들과 장성한 손주들이 아니라, 먼저간 남편의 마지막 나날들과 자신의 헬륨 키트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적어도 부질없는 고통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위안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2010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도 헬륨 키트를 쓰고 싶지 않다.(…) 머리에 뭔가를 뒤집어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 바람대로 리비는 헬륨 키트를 쓰지 않고 “평화롭게” 한 달 뒤인 3월 29일 집에서 별세했다.

생의 절반 낙태 권리를 위해

런던 의료인 가정에서 태어나

6남매 키우며 지역보건의 활동

불법 낙태수술 후유증 접하고

가족계획ㆍ피임 돕는 센터 개설

법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엘리자베스(리비) 윌슨(Elizabeth Wilson)은 1926년 6월 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간호사였고, 아버지는 의사였다. 언젠가 그는 “내가 의사가 되길 원치 않았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여성 의사가 극히 드문 때였다. 그는 런던 킹스칼리지 의대에 진학했고,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일했다. 병원 동료 의사였던 그레이엄과 49년 결혼해 6명의 아이를 낳았다.

영국이 낙태를 합법화한 건 1967년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때까지 영국 산부인과 환자의 태반이 불법 낙태수술 후유증 환자였고, 그들 대부분은 미혼여성이었다. 리비가 아이를 생기는 대로 낳은 것도, 아이들 키우느라 병원을 그만두고 셰필드 지역보건의(GP)가 된 것도, 낙태를 불법화한 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60년대 초 기혼여성 가족계획과 미혼ㆍ독신여성 피임을 돕는 ‘408 클리닉’이라는 여성보건센터를 개설했다. 그것도, 여성(자신)의 삶에 대한 법의 부당한 간섭을 어떻게든 최소화하자는 취지였다.

그의 클리닉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여성들이 아니라 윤리 경찰을 자임한 성직자와 지역 유지들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클리닉의 부도덕성을 성토했다. 리비는 “그건 우리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최고의 홍보였다.(…) 여성들이 몰려들어 클리닉이 있던 블록을 에워쌀 정도였다.”(가디언, 2016.4.12)

67년 그레이엄이 글래스고 의과대학 교수가 되면서 가족은 글래스고로 이사했다. 제철소, 조선소, 탄광들이 줄줄이 폐업하면서 도시가 황폐해져 가던 때였다. 리비는 갓 문을 연 가족계획협회 일을 거드는 한편 북부 슬럼가 방문상담 활동에 주력했고, 성병 피임 낙태와 관련된 궂은 일을 도맡았다. 거친 동네에 그가 적응한 방식은 스스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내보이는 거였다. 그가 훗날 설립한 존엄사 옹호단체 ‘FATE(Friends at the End)’는 그 무렵 한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찾아와 머뭇거리며 말을 잘 못하자 리비가 먼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는 일화를 전했다. “…문제가 뭐죠? 너무 빨리 싸요, 아니면 안 서요?(…is the problem that you are coming too soon, or can’t get it up?)” 환자들로 하여금 터놓고 말하게 하려고 선수를 친 것이기도 하겠지만, 평소 그의 성격과 어투가 그랬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를 이어 FATE 회장을 맡은 세일라 더피(Sheila Duffy)는 리비의 부고에서 “리비 윌슨은 개인의 권리를 위해 싸운 파이터였지만, 무엇보다 따듯하고 친절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리비는 90년 은퇴 후 가족계획 국제NGO인 ‘마리 스토프스 인터내셔널(MSI-Children by choice, not chance)’를 도와 아프리카 시에라레온에서 1년간 봉사활동을 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그는 “전 세계 어디나 여성은 다 똑같다. 내가 만난 시에라레온 여성들은 글래스고에서 만난 수많은 가난한 여성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남편을 두려워하고, 섹스를 거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또 아이를 낳곤 했다”고 말했다.(The Scotsman, 2009.10.1) 법은 법이고, 가부장권력은 또 가부장 권력이라는 얘기였다.

MSI는 고생물학자로 영국 최초의 산아제한 클리닉을 연 마리 스토프스(Marie Stopes, 1880~1958)를 기려 설립한 단체로, 아프리카 등 의료 낙후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피임과 성 보건 교육, 콘돔 보급과 피임 시술, 낙태가 합법인 국가에서는 낙태와 낙태 후 치료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단체다. MSI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는 복합적인 이유로 현대적 낙태의료서비스를 못 받는 여성이 2억2,500만 명 있고, 한해 평균 28만9,000명의 임산부가 출산 과정에서 숨지며, 2,000만 명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 시술을 받고, 그 중 4만 7,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리비는 시에라레온에서의 경험과 여성이 임신ㆍ출산ㆍ낙태와 관련해 겪게 되는 문제들을 ‘Unexpected Always Happens’라는 제목을 달아 책을 썼다. 앞서 2004년에 낸 ‘Sex on the Rates’는 글래스고 성ㆍ피임클리닉에서 겪은 일화를 엮은 책이라고 한다.

나머지 절반은 존엄사 위해

남편과 사별 뒤 합법화 운동

급진 조력 자살협회 Fate 설립

2009년 죽음 돕다 연행되기도

“반대 관점 충분히 이해하지만내 생각도 짓밟지 말아달라”

남편과 사별한 리비는 ‘자발적 안락사 협회(Voluntary Euthanasia Society, 일명 Exit)’에 가입, 조력 자살 합법화 운동을 시작했다. 1935년 설립된 협회는 환자와 의사를 보호하며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지지하는 시민단체로, 법 개정 운동과 함께 존엄사 안내서 ‘How to Die With Dignity’(80) 등 다양한 관련 서적 출판과 연구를 병행해온 단체다. 리비는 “활동 방식이 못 마땅해” 99년 협회를 탈퇴, 독자적인 단체 ‘Fate’를 설립했다. 두 단체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Fate 역시 은퇴한 의사와 변호사, 학자, 운동가 등이 주축이 돼 조력자살 관련 법 개정 운동과 존엄사와 관련된 다양한 기술적ㆍ윤리적 연구 및 교육ㆍ홍보, 공개 세미나 등 행사를 벌여왔다. 개별 상담은 물론이고 특별한 경우 스위스 조력자살 기관‘디그니타스’까지 동행 서비스도 마다하지 않은 점에 비춰, Fate가 좀 더 ‘급진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을 병행했던 듯하다.

영국 상원은 1936년과 69년 두 차례 자발적 안락사 법안을 부결한 바 있다. 61년 자살법(Suicide Act)에는 조력자살 관련 조항이 없어, 자살을 도울 경우 판사 재량에 따라 살인 방조나 과실치사죄가 적용돼 최고 14년 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였다. 2009년 9월 인권변호사 출신 검찰총장 케이어 스타머(Keir Starmer,1962~ ㆍ현 노동당 하원의원)가 기소 가이드라인, 즉 금전적인 이익을 얻지 않고 말기 환자의 의지에 따라 자살하려는 이를 선의로 돕는 경우 기소를 지양하라는 지침을 내리기까지, 자살을 도우려면 징역형을 각오해야 했다.

리비가 서리 주 워킹 시 경찰에 연행된 건 스타머의 지침이 발표된 지 꼭 일주일 뒤였다. 앞서 6월 자살한 대학 강사 캐리 로더(Cari Loderㆍ당시 48세)의 죽음을 리비가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혐의였다.

로더는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30대 초 발병한 다발성경화증으로 고통 받던 로더는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와 비타민, 아미노산 등을 우연히 복합 투여한 결과 병세가 눈에 띄게 호전됐고, 자신의 투병 체험기를 ‘Standing in the Sunshine’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해 주목을 끌었다. 의학계는 ‘캐리 로더 요법’으로 알려진 그의 처방으로 임상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2009년 그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했다. 요양시설에는 결코 가기 않겠다던 독신의 그는 Fate에 전화로 도움을 청했고, 거기 리비가 응했다. “로더는 실행을 위한 거의 모든 준비를 갖춘 상태였고, 다만 도움이 될 만한 마지막 정보가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아주 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었고, 무엇보다 결심이 확고했다”고 리비는 말했다.(The Independent, 2009.6.23) 리비는 또 “그는 몸이 마비돼가는 상황에도 혼자 자신의 삶을 책임질 만큼 독립적인 여성이었지만 (죽기 위한 준비까지) 혼자 해내야 하는 현실을 끔찍하게 여겼다”고도 전했다.(Telegraph, 2009.6.21)

로더는 이웃에게 강아지 산책을 부탁한 뒤 인터넷으로 구입한 헬륨 키트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발적이며 모든 과정을 스스로 실행했음을 밝히는 유서를 남겼다.

하지만 경찰은 83세 ‘피의자’리비를 연행했고, 자해나 자살을 시도할까 봐 그의 신발 끈을 풀고 펜까지 압수했다고 한다. 리비는 당일 풀려났지만, 검찰이 최종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것은 1년여 뒤인 2010년 8월이었다. Fate 대변인은 “리비 같은 이들이 여전히 법적으로 불안전한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염려스럽지만, 막대한 세금과 경찰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고 논평했다.(DailyMail, 2010.8.17) 조력자살 캠페이너들은 “만일 법이 의료진의 조력자살을 허용했다면, 로더는 병세가 더 악화할 때까지 조금은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텔레그래프, 위 기사) 리비 역시 자신이 상담한 수많은 이들이 아직 육체를 통제할 힘- 적어도 밸브를 열 힘, 독극물 든 잔을 들 힘-을 지닌 채 죽어간 현실에 분노했다. “나는 윤리적 관점에서 내 입장에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그들은 내 생각을 짓밟으려고만 하느냐는 거다. 사람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끝맺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Scotsman, 위 기사)

스코틀랜드 의회의 마고 맥도널드(Margo MacDonald, 1943~2014) 의원은 남편 짐 실러스 전 의원과 함께 2007년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전범 기소를 촉구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당시 법무장관에게 제출한 일로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블레어가 주권국 이라크 침공을 공모ㆍ강행함으로써 국제법과 스코틀랜드 국내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맥도널드는 파킨슨병(96년 발병) 환자였다. 진단 후 투병하면서, 또 여러 환자와 가족들을 만나면서, 그는 열정적인 조력자살 옹호론자가 됐다. 그는 숨지기 직전 어렵사리 자신의 이름을 딴 조력자살 허용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그는 2014년 4월 별세했고, 의회는 이듬해 법안을 부결했다. 리비는 글래스고 자택 욕실 벽에 마고가 서명한 법안 사본을 걸어두고 살았다.(가디언 위 기사)

리비는 이언 랜킨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던 스릴러 마니아였고, 그의 서재 책장은 온갖 범죄 추리 소설들로 빼곡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가장 걱정 없고 행복한 시간들을 거기서 그 책들과 함께 보냈을 것이다. 책장 맨 위칸에는 빨간 작은 상자가 늘 놓여 있었는데, 상자에는 검은 색 해골 심볼이 아니라 활짝 웃는 아이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헬륨 키트 상자였다.(Scotsman, 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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