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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대한민국은 ‘악성’ 위험사회다

입력
2016.05.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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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층의 비리 사슬이 위험의 근원

타율적 공무원 공익 수호자 역할 못해

정치ㆍ관료조직 혁신 못하면 재앙 반복

5일 오전 서울광장을 찾은 부모와 아이들이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환경운동연합, 어린이날 맞아 가습기 살균제 옥시 불매 인증샷 캠페인'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5일 오전 서울광장을 찾은 부모와 아이들이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환경운동연합, 어린이날 맞아 가습기 살균제 옥시 불매 인증샷 캠페인'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1989년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대형 참사를 수없이 목격하고 취재했다. 93년 10월 서해훼리호 침몰사고(292명 사망),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32명 사망), 95년 4월 대구지하철가스폭발사고(101명 사망), 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502명 사망), 2003년 2월 대구지하철방화사고(192명 사망),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사고(304명 사망). 하나 같이 국가가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안방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다.” 7년 전 아들 승준(당시 5세)이를 가습기 살균제로 잃은 119 구급대원 김덕종(40)씨의 절규다. 그렇다. 살균제 참사는 탐욕스러운 기업과 무책임한 관료들이 결탁해 빚어낸 전형적인 인재다. 1996년 ‘작업시 노출금지’가 경고됐던 유독물질이 살균제로 둔갑해 20년 동안 1,000만 여명이 호흡했고, 10년 전부터 산모와 어린이들이 원인 미상의 호흡 곤란 증상으로 숨져갔다. 그런데도 안전성 검토나 원인 규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땅에 과연 국가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공무원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인가.

서울중앙지검 임은정 검사는 2012년 말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검찰 지휘부의 지시가 잘못이라고 판단해 무죄를 구형했다가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법무부장관 상대로 징계처분취소 소송을 낸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해야 한다. 검사는 검찰과 국가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의 정의에 대한 의지를 표시해야 한다.”

영어로 공무원은 ‘civil servant’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공무원들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한국의 관료조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철저히 윗사람의 의중을 따른다.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게 아니라 상명하복에 의한 타율적 통제시스템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탓이다. 상관의 잘못되고 불합리한 명령과 통제를 거부했다간 윤석렬 검사나 권은희 수사과장처럼 곤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공무원들이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고 상관과 권력에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대형 재난이 터지면 정부는 국민적 공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인다. 검찰을 동원해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고 TF를 구성해 재발방지책을 내놓는 등 호들갑을 떤다. 해양경찰청 해체와 국가안전처 신설 등 엄청난 개혁인양 눈가림하는 조치도 약속한다. 한국의 관료조직은 각 직무의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결과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권력층과 관료들의 지위 남용을 통한 기득권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혹자는 기업의 부도덕성에 화살을 겨누지만 근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기업은 철저히 이기적 동기로 움직인다. 영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한다. 그들에게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수는 있으나 지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국민은 경쟁과 약육강식의 전쟁터에서 일정기간 공정한 심판 역할을 할 정치인을 뽑아 관료조직을 통제할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이 제 역할을 해야 민주사회요 선진국이다. 그런데 이들이 규정과 법을 무시하는 기업 행태에 눈감으니 재앙이 되풀이 된다.

현대사회는 풍요사회이자 위험사회다. 성장은 발전의 동의어가 아니다. 풍요를 누리기 위해 반민주적ㆍ반생태적인 개발이 도처에서 벌어지면 반드시 큰 위험이 찾아온다. 특히 한국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대형 참사가 반복되는 악성 위험사회다. 공적 사명감을 팽개치고 기업의 탐욕을 방조하는 국가에 의해 언제 어디서 재앙이 터질지 모른다.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려면 우리 사회 곳곳에 시한폭탄처럼 잠재된 위험을 잘 관리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정치와 관료조직을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제2의 세월호, 제2의 살균제 참사가 반복될 것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고재학국장02] 고재학 논설위원 /2016-01-15(한국일보)/2016-01-15(한국일보)
[고재학국장02] 고재학 논설위원 /2016-01-15(한국일보)/2016-01-15(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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