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빛 참 곱다. 연두 물결이 능선을 타고 오른다. 꼭대기에서부터 단풍이 내려왔던 길을 초록이 거슬러 오른다. 이른 새벽 간월재에 올랐다. 아름다움은 경계에 있다. 이 무렵 간월재는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인위적인 경계 외에, 겨울에서 봄과 여름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경계, 바다에서 1000고지에 이르는 고도차가 빚어내는 물리적 경계의 아름다움이 혼재한다.
누구인지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울산 울주를 기준으로 경북 경주와 청도, 경남 양산과 밀양에 걸친 해발 1,000m 봉우리를 연결하는 산줄기를 영남알프스라 부른다. 유럽 여러 나라에 걸쳐있는 알프스산맥에 빗댄 이름이다. 울주군 상북면 ‘등억알프스리’의 간월재는 영남알프스의 관문. 간월재를 기준으로 북으로는 간월산과 가지산, 서로는 재약산과 천황산, 남으로는 신불산과 영축산이 800~1200m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연결된다.
‘주민들은 시월이면 간월재에 올라 억새를 베 날랐다. 다발로 묶어 지게에 한 짐씩 지고 내려와 억새지붕을 이었다.’ 정상의 안내문처럼 간월재는 억새평원으로 이름난 곳이다. ‘배내골 주민, 울산 소금장수, 언양 소장수, 장꾼들이 줄을 지어 넘었다’는 설명이 의심스러울 만큼 만만찮은 높이(해발 900m)다. 전날 비가 오지 않았다면 굳이 새벽에 이 높은 곳까지 오를 생각은 없었다.





기대한 대로 언양에서 울산 앞바다로 이어지는 산 아래가 잔잔한 구름바다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마을이 보이고, 그 앞뒤로 높고 낮은 산자락이 간신히 봉우리만 드러냈다. 부지런한 산새 소리만 이따금씩 잉잉대는 바람에 흩날릴 뿐, 구름바다는 세상의 모든 소음과 잡념과 혼란을 집어 삼켰다. 천상과 지상의 경계.
수평선인지 지평선인지 모호한 띠를 뚫고 아침 해가 솟아오르자 세상은 선명하게 위아래로 갈라졌다. 어둑한 회색 구름바다 위로 파란 하늘이 열렸다. 여명에 붉게 물들었던 몇 가닥 새털구름도 이내 하얗게 밝아졌다. 신불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는 공룡의 등허리를 닮았다고 일명 공룡능선, 오렌지 빛 햇살이 초록 능선으로 쏟아지자 치마폭처럼 겹쳐진 골짜기의 명암이 더욱 도드라진다. 붉은 기운이 걷히고 태양이 말간 얼굴을 드러내자, 선계에 갇혔던 산과 마을도 그제야 마법에서 풀려났다. 빛과 어둠의 경계.
산 아래는 이미 녹음이 짙어졌지만 능선을 오르는 봄기운은 산정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철 지난 진달래가 막 절정을 넘겼고, 철쭉도 이제 망울을 터트렸다. 신록의 기운은 중턱을 지나며 연두 빛으로 옅어지고, 정상부위는 아직 무채색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다. 억새평원은 6월은 돼야 초록으로 덮일 것이다. 여름과 봄과 겨울의 경계.


간월재 등산은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나 배내고개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 어느 코스나 2시간 30분 이상 잡아야 한다.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을 이용하면 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신불산휴양림은 숙소가 상하 2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숙소 앞에 차를 대는 것과 달리, 신불산휴양림의 상단 숙소를 이용하려면 하단에 차를 대고 1시간(2.3km) 이상 걸어야 한다. 중간지점에 15m 높이의 파래소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고 있어 휴양림 명칭에 폭포가 들어갔다.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소원을 비는(바라는) 곳이어서 파래소라 하기도 하고,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모자랄 만큼 깊은 소(沼)의 검푸른 빛깔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올 봄엔 비가 충분히 내려 폭포가 아니어도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다. 두 숙소를 연결하는 길 자체가 등산로다. 하단 숙소에서는 신불산 정상까지, 상단 숙소에서는 간월재로 오르는 등산로가 연결된다.
울주=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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