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작품을 압도하면 감상에 방해를 받는다. 서울 교통의 요지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문화역서울 284(구 서울역)도 그런 축에 속한다. 옛 기차역을 그대로 복원한 돔 형태의 건물은 역사성은 머금었을지언정 전시장으로서 각광받지는 못했다. 어지간한 작품은 서울역의 아름다움을 능가하지 못하니 관람자 입장에서도 반쯤 걱정을 하며 전시장에 발을 디뎠던 것이 사실이다.
전시, 공연, 영화, 토크쇼 등 다양한 장르를 한데 버무린 융복합 예술 프로젝트 ‘복숭아 꽃이 피었습니다’는 오히려 그런 서울역을 십분 활용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과 집중도 동시에 끌어올렸다. 기둥 뒤편, 비좁은 방 등 전시에서 배제됐던 공간에 과감히 작품을 배치했다. 관객이 서울역 구석구석을 탐험하도록 미션도 내린다.
그 중에서도 호주 극단 원스텝의 공연 ‘업사이드다운인사이드아웃’이 눈길을 끈다. 팀은 책, 영상, 연극 등 곳곳에 숨겨진 장치들을 관객이 직접 체험해야만 극이 진행될 수 있도록 공연을 구성했다. 가상의 요정이 “그곳에 서서 한번 시계를 봐봐” “시계를 마주본 채로 쌍둥이처럼 서로 가까이 마주 붙어있는 돌기둥을 찾은 뒤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라는 식으로 안내를 하면 관객은 마치 보물을 찾듯 공간을 탐방한다. 옛 서울역에 깃든 역사와 이야기들이 공연과 자연스레 어우러지길 바라며 원스텝은 무려 한 달을 한국에 머무르기도 했다. 큼지막한 창이 있어 전시에 부적합하다 여겨졌던 방에는 오히려 노란색 셀로판지를 붙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은 내부에 설치된 ‘명상 의자’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며 작품의 일부가 됐다.
‘복숭아 꽃’이라는 전시 제목에서 얼추 짐작할 수 있듯, 프로젝트는 ‘이상적인 삶’을 주제로 삼았다. 전세계 7개국 27개 팀의 다양한 관점이 반영된 작품들은 그 자체로도 힘이 있어 공간에 기죽지 않는다. 빨간 풍선 나무가 뿌리 째 뽑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보이는 김명범 작가의 작품(Untitled, 2009), 탐스러운 모형 복숭아 여러 개를 바닥에 깔아놓은 양아치(성진은 복숭아꽃 한 가지를 꺾어 팔 선녀에게 던지는데, 2016)의 작품은 흡사 머리 속 이미지를 현실에 재현해낸 듯한 모습이다.
이상을 꿈꾸기 앞서 사회문제에 초점을 둔 작품도 있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토프 브뤼노의 ‘와이파이-에스엠’은 전쟁, 기아, 난민 등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뜰 때마다 실시간으로 관객에게 자극을 주는 장치로 관객이 사회적 고통에 공감하기를 요구한다. 이 밖에도 직접 낭독을 해보거나 쿠키를 집어 먹는 식으로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작품도 많다.
문화역서울 284의 신수진 예술감독은 “아주 ‘귀찮은’ 감상이 될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한 걸음 떨어져 작품을 감상하는 미술관 투어는 잊고 여기 낙원에 흠뻑 빠져 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예술 무릉도원에 들어와 즐기라는 의미에서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6월 26일까지.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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