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상암에서 일을 한다. 상암엔 방송국이 많다. 가끔 방송국 앞을 걷다가 깜짝 놀란다. 찰칵찰칵. 누군가 대포 카메라로 사진을 막 찍는다. 나는 연예인도 아닌데. 놀라서 돌아보면, 소녀 팬들이다. 물론 내 팬일 리가 없다. 방송국 앞에 진을 친 소녀 팬들은 아이돌 오빠, 언니를 기다리는 동안 테스트용 피사체가 필요한 것뿐이다.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종종걸음으로 카메라 앞을 지난다. ‘쟤들은 집에도 안 가나.’ 구시렁댄다. 마치 나는 누군가의 열성 팬이었던 적이라곤 없는 것처럼. 나의 빠심 팬심은 잠든 지 오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Oh Love, 왜 이제서야, 많이 외롭던, 나를 찾아온 거야.” (젝스키스 노래 가사)
23일, 무한도전 토토가가 내 팬심의 망령을 소환했다. 1990년대 아이돌 ‘젝키짱’의 16년 만의 컴백 무대. 월드컵 경기장이 노란 풍선으로 뒤덮였다. 나는 TV 앞에 앉아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사실 H.O.T 팬이었는데도) 엉엉 울었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했던 시간 속으로 16년 만에 다시 풍덩 뛰어들 수 있다는 것. 객석을 가득 채운, 곤히 잠든 갓난애를 안고 온 소녀팬에게 그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젝키 멤버도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서른여덟이라 안 울려고 했는데….”
팬도 아이돌도 같이 늙었다. 늙고 나서 만나니 감회가 다르다. 다른 게 보인다. 카리스마로 무장했던 그 시절의 ‘우상’은 사실 입만 열면 엄청 웃긴 애였다. 이미지 메이킹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획사에서 입도 못 열게 했다는 말을 듣는데, 이전 같으면 웃음이 날 텐데 이젠 웃음이 안 난다. 젝키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자리엔 돈 문제로 부모님이 같이 모였었다고 했다. ‘오빠들’의 춤이, 농담이, 사실 꿈 이루고 돈 벌려고 기획된 ‘노동’이란 걸 이젠 안다. 누군가는 그래서 배신감이 드는 거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연민이 든다.
아이돌이라는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누구는 입도 못 연다. 카리스마라는 이미지를 팔려면 그래야 한대서. 수명도 짧다. 불안정하다. 십대에 데뷔하고 사라지는 수많은 아이돌. 젝키도 십대에 데뷔했다. 큰 인기를 얻고 3년간 활동했는데 해체 후 세월이 흘러서 이제 개중 누군가는 서른여덟이다. 그 사이의 공백은 어디로 갔을까. 수많은 젝키는 다 어디로 사라질까. 요즘 상암동 방송국 앞에서 팬들이 기다리는 아이돌이 누군지, 나는 이름을 들어도 모른다. 또 몇 개월만 지나면 다른 애들이 올 것이다.
화려하게 기획된 노동. 방송국엔 가장 싸고 적극적인 출연자. 기획사엔 유통기한을 계산할 수밖에 없는 문화상품. 팬에겐 열망의 대상. 그 사이에 아이돌이 있다. 여기저기 치인다. 팬에게도 치인다. 아이돌의 유통기한은 팬덤이 단단하면 늘어나고, 팬덤이 부실하면 줄어든다. 팬이 목숨줄 잡고 있다. 그러니까 아이돌의 사생활 관리, 이미지 메이킹은 말 그대로 ‘손실’을 줄이기 위한 전략책이다. 자기 규율이 필수다. 아이돌의 상품 가치를 계산하는 공식에 따라야 한다. ‘내가 원하는 그대로 있어 달라.’는 팬들의 순수한 소망이 아이돌의 목을 조른다. 내가 사랑했던 아이돌이 나의 그런 사랑 위에, 그런 노동 위에 만들어졌었구나 싶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내 세대의 아이돌들을 돌아본다. 이제 결혼하고 애도 낳고 머리 벗어져서 탈모 클리닉 다니고 그런다. 좀 덜 엄격했으면 좋겠다. ‘이 사회에서 사랑받으려면 이런 행동을 해야지’ 라는 것. 아이돌은 가장 그 압박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받는 게 직업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무리한 요구에 길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음. 아무래도 역시, 아이돌도 노조가 필요해.
조소담 비트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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