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중ㆍ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사용 승인을 받기 전인 2014년 11월 경주의 한 환경단체는 A4용지 2장 분량의 우편물을 받았다. 방폐장 설계와 건설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고려하지 않아 향후 문제가 생길 우려가 크다는 제보였다. 당시 이 단체는 제보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제보자를 수소문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방폐장은 그 해 12월 사용 승인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 반도 안 된 지금 제보 내용은 현실이 됐다.
방폐장 배수 시스템 문제를 지적한 본보 기사가 나간 뒤 이 환경단체 관계자는 “어디선가 본 내용인 것 같아 과거 자료를 뒤져 찾아냈다”며 당시 제보 문서를 기자에게 보내왔다. 문서엔 염분 등 지하수의 화학성분 영향이 설계에 반영되지 않아 배수펌프와 배관이 조기에 부식될 수 있고, 이는 주변 콘크리트 구조물의 수명을 단축시킬 위험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부식에 견딜 수 있도록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들어야 할 펌프와 배관이 내부식성이 약한 탄소강으로 만들어졌다는 문제도 지적돼 있었다. 실제로 방폐장 펌프는 현재 부식이 심각해 모두 스테인리스 제품으로 교체된 상태다. 배관 내부에도 이물질이 쌓여 별도 제거장치가 설치됐다.
원자력 설계ㆍ건설 분야에서 30여 년 일하고 2013년 퇴직한 것으로 알려진 제보자는 방폐장 운영사인 한국원자력환경공단과 규제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에 먼저 의견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보 문서에는 당시 공단과 KINS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원자력폐기물규제분석센터(CNWRA)에서 문제가 없다고 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
물론 전문가의 제보라고 해서 늘 정확하다고 할 순 없다. 중요한 건 국내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술자의 이야기에 공단과 KINS가 과연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느냐 하는 부분이다. 평가 기간에 잠시 둘러본 남의 나라 공공시설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외국 전문가의 말 한마디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국내 관련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한 기술자의 목소리는 무시한 것 아닌지 묻고 싶다. 관련 기관에서 이 제보에 진작 귀 기울였다면 이제 와서 펌프 교체와 배관 보수 등에 9억원을 추가로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국내 원자력 업계엔 이 제보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아직 많을 것으로 믿는다. 그들에게 우리의 방폐장을 맡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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