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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술 안 권하는 사회

입력
2016.05.0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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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가 너무 안 되는데, 술을 마셔야 해.”

지인 A는 중소기업의 사장이다.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술을 마신다. 술 없이는 비즈니스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인 B는 췌장염에 걸려 1년 째 금주다.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면 마치 ‘이제 끝났군’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난감해 한다. 물론 술 한 잔 못하는 최고경영자(CEO)도 있다. 술 대신 투명한 영업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린 사람도 있다. 그건 신화고, 현실은 술이다.

지인 C는 술을 마시다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갔다. 이제 40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다. (내 주변엔 왜 죄다 이런 사람들만 있나?) 최여사는 50대지만 현대 의술의 덕택으로 여전히 아가씨처럼 보인다. 그녀는 늘 연하의 남성을 사귄다. “어린 남자만 사귀는 이유는 뭐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답한다. “응, 내 또래들은 다 갔어. 간경화로.”

도대체 왜 이렇게 술을 마시는가. 한민족의 유전자 속에 알코올 애호 세포가 있다고?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 고구려, 삼한에 이르기까지 주야로 음주가무를 했다”란 기록이 있다는 말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의 습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와 말 먹이는 이의 집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독서를 익혔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고구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조가 조공 무역의 제일 관심사를 당시 문화선진국이었던 중국 서적 수입에 두었다는 역사는 금시초문이다.

내가 원치 않는데 누군가 나를 강제로 범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를 강간범으로 고소할 거다. 내가 원치 않는데 누군가 내 가슴을 더듬거나(나는 남자지만 바디빌딩을 해서 가슴 근육이 발달해 있다) 내 허벅지를 더듬는다면(허벅지도 발달해 있다) 나는 그를 성 추행범으로 신고할 거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동의한다. 만약 내가 술을 마시기 싫어하는데, 나의 의사에 반하여 나에게 술을 권하고 술 마시기를 강요하고 술자리에 있기를 강제한다면 어떨까. 이 때 나에게 술을 강권하는 ‘그’에 대해서 우리는 대체로 관대하다.

1990년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상관은 음주 강권자였다. 점심 때 소주 한 병이 예사였고, 저녁때는 주 3일 회식을 했다. 가장 치사했던 건, 내가 마시는 술잔의 분량까지 신경 써가며 마시길 강요했다는 거다. 회사생활보다 회식생활이 더 힘들었다. 업무보다 알코올 섭취가 더 고되었다. 내 약속은 상관의 한 시간 전 회식 통보로 취소되기 일쑤였다. 회사를 3년 만에 그만두었을 때, 나는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온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보면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방종한 박쿠스 축제를 벌이는 자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이성을 잃은 이들이 몰려와 “우리 모두 단합해서 이 자를 죽이자” 며 펜테우스의 사지를 찢는데 이 중에는 펜테우스의 어머니와 이모들도 있었다. 그들 눈에는 펜테우스가 멧돼지로 보였다. 취한 자들이 단합하면 멀쩡한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신화는 ‘우리 모두 취해서 부정부패나 구린 것들은 눈감아 주고 우리끼리 나눠 먹고 포함되지 않는 자들은 다 멸하자…’라는 상징처럼 보인다. 이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왜 지인들이 어두운 룸살롱에 모여 사업을 이야기했는지, 왜 내부자들이 벌거벗고 폭탄주를 돌리며 국정을 논했는지 알겠다. 우리는 결코 음주가무의 민족이 아니었다. 호학(好學)의 민족이었다. 술 권하는 사회는 그만. 충분히 마시지 않았는가. 이제 나에게 술 대신 손에 잡고 읽기 좋은 책 한 권을 권해 다오. 나, 오래 살고 싶다.

명로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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