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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노무현의 한, 박근혜의 한

입력
2016.05.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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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언론간부 간담회 울분 토로

10년 전 노 전 대통령 야당 성토 방불

대통령 한 악순환 고리 끊을 길 찾아야

2005년 9월 7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5년 9월 7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발목을 잡고 중요 법안처리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야당을 비난할 때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노 전 대통령도 재임 시 야당의 국정 및 개혁 발목 잡기에 무던히 속을 썩히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 야당 한나라당 대표가 바로 박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1년 7개월쯤 남았을 때인 2006년 8월 중순이었다. 청와대 관저로 한국일보 등 4개 언론사 외교안보 분야 논설위원들을 초청해 가진 비공식 오찬 간담회에 나도 참석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강력히 추진하던 그에 대해 보수진영의 비판이 쇄도하던 때였다. 노 대통령은 전작권 전환에 긍정적 논조를 편 논설위원들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의견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전작권 전환 문제, 북한 급변사태 시 작전계획 5029논란, 북핵, 한미FTA추진 등 외교안보 관련 사항들이 주요 화제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방해로 수많은 개혁법안이 국회에 묶여 표류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성토와 울분을 토해내는 데도 많은 시간을 썼다. 2시간 10분 가량 이어진 간담회 도중 그는 줄담배를 피웠다. “오죽했으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한이 맺힌 듯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이날 간담회는 비보도 전제여서 참석 언론사는 보도하지 않았지만 초청되지 않은 한 신문이 간담회 내용 메모를 입수해 보도하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주한 미 대사관측이 이 메모를 입수해 본국에 보고한 전문이 2011년 위키리크스 폭로로 새삼스럽게 주목됐지만 이미 국내 언론에 다 보도된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언론사 편집ㆍ보도국장들과 가진 오찬간담회 발언 내용에 기시감(데자뷰)을 느꼈다. 박 대통령은 파견법 등 일자리 관련 법안들이 야당에 막혀 처리되지 못한 상황을 성토하며 “임기를 마치면 엄청난 한이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몇 년을 호소하면 ‘그래 해 봐라, 그리고 책임져 봐라’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하지도 못하게 하고 책임지라고 하면…. 할 수 있어야 책임을 지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노 전 대통령이 하던 말을 다시 듣는 것 같다. 간담회를 가진 시기도 잔여 임기로 봤을 때 비슷하다.

집권한 뒤에는 야당 시절의 입장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야당 때 가졌던 심정으로 지금의 야당을 대한다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않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3년 차인 2005년 6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중ㆍ대선거구제로 바꾸는 것을 전제로 한나라당에 국무총리를 포함한 장관 임명권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 대표는 “헌법 파괴”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박 대통령은 4ㆍ13 총선 참패 후 일각서 제기되고 있는 국민의당 등과의 연정론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야당 대표시절과의 일관성은 있다. 하지만 민생과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한 법안 처리, 주요 국정과제 수행에 야당의 협력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간단히 거절해 버릴 일은 아닌 것 같다. 여야 대표들과 만나고 회동 정례화도 검토한다지만 그 정도로 여소야대 구도에서 남은 임기 동안 원활하게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보수 진영 일각서 박 대통령의 새누리당 탈당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전에서는 수평적 당ㆍ청 관계 수립이 최대 쟁점이다. 친박계 유기준 의원은 청와대의 강력한 제동에도 원내대표 경선 출마 의지를 접지 않았다. 친박계 내부 자중지란이라는 분석이지만 박 대통령도 새누리당과의 관계를 전혀 새롭게 접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인 2012년 8월 말 경남 김해 봉하 마을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박 대통령이 노무현의 한에 자신의 한을 더하지 않을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계성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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