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톱스타는 아니나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보조적인 역할을 주로 맡으면서도 빛나는 작은 별들이 영화 방송 대중음악계에 많다. 한국 대중문화계를 지탱하는 숨은 인물들을 ‘사이드-B’를 통해 소개한다.
처음엔 일본사람인줄 알았다. 능숙한 일본어부터 돋보였다. 책을 읽는 듯한 국내 배우들의 일본어 발음과 달랐다. 살짝 째진 눈이,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된 얄미운 일본인의 전형이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1,27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암살’을 통해 그의 이미지는 도드라졌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거사를 돕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던 일본인 바텐더 기무라 역으로 국내 관객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는 시인 윤동주를 취조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고등형사를 연기해 호평 받았다.
돌아보니 그가 맡은 역할은 족족 일본인이었다. 일본 대사(‘굿모닝 프레지던트’)를 연기하다가 일본 총리(‘식객: 김치전쟁’)로 변신했고 일본군 장교(‘마이웨이’)를 거쳐 일본인 탁구해설가(‘코리아’)가 됐다. ‘미스터고’에서는 일본 프로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역할을 했고, ‘깡철이’에서는 야쿠자로 분했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아가씨’와 ‘덕혜옹주’에서도 일본인이다. 이달 촬영에 들어가는 ‘군함도’에서도 일본인을 연기한다. 일본인 역할 전문 배우라는 수식을 얻을 만도 하다.
일본어 하나만 믿고 충무로를 종횡무진하는 늦깎이 신인은 아니다. 배우 김인우(47)는 재일동포 3세다.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나고 자랐다. 16세 때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18세 때 고교 중퇴 뒤 도쿄로 상경해 배우 수업을 받았다. 2008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20편 가량의 영화에 출연했고, 40여 편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일본에서 연기 내공을 키운 중년의 배우가 현해탄을 건너 한국에 정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얻은 성취는 어느 정도일까. 지난 28일 오후 한국일보를 찾은 그와 마주앉았다.
-한국에 오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무엇인가.
“한국 오기 전 3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 인생의 바닥을 치던 때였다. 괴로워서 술을 많이 마셨고 간이 안 좋아 죽을 지경까지 갔다. 돈도 다 날리고, 일자리도 없고 인간 관계도 엉망이었다. 한국영화 ‘파이란’과 ‘집으로’를 보고 감명 받았고 3년 고민 끝에 한국에 왔다.”
-얼마나 힘들었길래 마흔이 다 돼 한국에 올 생각을 했나.
“몇 차례 배신을 당했다. 우리 때는 차별도 심했다. 어느 아파트에 입주하려 해도 미국인은 되지만 한국인은 안 된다는 식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 해도 한국인은 안 된다는 차별이 있었다. 연기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어 연기 강사로 일했는데 학부모들의 모함으로 두 군데 정도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배신 당해 배우 일거리도 없었다. 먹고 살려니 창피해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전단을 나눠주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밤에만 일했다. 술집 여자 종업원을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 주는 일도 했다. 한국 오기 직전까지 그랬다. 그래도 먹고 살기는 어려웠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모르겠다.”
-한국에서 첫 작품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어떻게 출연했나.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하다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한국 스타일의 프로필은 어떻게 만드는지 알게 됐고 프로필을 돌린 뒤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됐다.”
-이제 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영화 쪽에서는 일본인 역할로 나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굳이 프로필 돌리지 않아도 섭외가 들어오고 출연하게 된다. TV드라마 쪽은 대행사를 통해 섭외가 된다.”
-재일동포라고 하나 한국은 낯선 나라였을 텐데.
“맞다. 한국에 처음 여행 왔을 때가 2002년이다. 2박3일을 보내는데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활기차서 정말 보기 좋았다. 누군가 일본에서 평생 살래, 한국에서 평생 살래? 물으면 한국이라고 답할 거 같다. 일본에서는 나 혼자 이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선 ‘형 뭐해?’ 하며 연락이 계속 온다. 이런 정이 내게 잘 맞는다.”
-연기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6세 때 일본영화를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1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우리 4남매를 버렸다. 조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적으로)살았기에 학교를 그만 두고 도쿄로 갈 때 말릴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연기학원을 다녔다.”
-일본에서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이다. (마을 사람으로 나오는) 작은 역할이었는데 평생의 재산이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에서 단역 조연을 했다. 어쩌다 보니 깡패 역할이 많았다(웃음). 내가 ‘쌈마이’(3류)를 하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약간 어설픈 그런 역할을. 한국 오기 전 2, 3년은 무대에만 올랐다.”
-한국에 올 때 어떤 생각이었나.
“두려움밖에 없었다. (일본에서의)모든 것을 버려야 했으니까. 한국 올 때 모든 걸 정리하고 왔다. ‘아직 마흔이야, 오십 됐을 때보다 마흔에 하는 게 나을 거다. 내 인생 내 한 몸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며 한국에 왔다. 큰 여행가방 하나 들고 일본을 떠났다. 경희대 어학당 개교를 이틀 앞두고 와서 호텔에 머물며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을 언제부터 동경하게 됐나.
“처음 본 한국영화가 ‘쉬리’였다. 한국영화이니까 재미없으려니 하다 ‘쉬리’를 본 뒤 빠져들었다. ‘겨울연가’가 소문이 자자할 때도 ‘(한국 드라마를) 잘 만들었을 리 없잖아’ 하며 보다가 빠졌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보는 때가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됐다. 하루 20시간 동안 본 적도 있다. 언젠가는 저 곳에 가서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굿모닝 프레지던트’ 첫 촬영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동적이었다.”
-첫 출연료랑 지금 출연료를 비교하면.
“출연료는 처음보다 5배 가량 늘었다. 1회 촬영을 계산해서 출연료를 받는다.”
-일본인 역할 전문이라는 수식이 배우로서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에 올 때 첫 목표가 10년 이내에 ‘일본인 역할은 김인우’라는 사실을 다들 알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 단계는 넘었으니 이제 한국인 역할을 하고 싶다.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만들어지는 단편 ‘과대망상자들’에서는 한국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한국어가 진짜 어렵다. 내 말투가 아직 어색하다고 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
-여러 일본인 역할 중에도 연기 해보고 싶었던 인물이 있나.
“진짜 자신이 있던 야비한 역할이 있었는데 투자가 안 돼 영화 촬영이 무산됐다. 한국인 오페라 가수를 괴롭히는 일본인 에이전트 역할이다. 난 내 성격과 비슷한 인물의 연기에 자신이 없다. 나랑 반대 스타일의 인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영감을 준 배우가 있나.
“한국에 연기 잘하는 사람 진짜 많다, 진짜. 한석규, 황정민을 좋아한다. 황정민과 ‘군함도’를 같이하게 돼 영광이다. 황정민은 얼마나 (연기의) 서랍이 많은지 매번 연기가 다르다. 배우는 한계가 있는데 그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 배우 입장에서 보면 폭이 넓다. 보통 관객들에겐 목소리 톤이 똑같이 들리겠지만 배우가 듣기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오! 브라더스’의 이범수 연기를 보고 깜짝 놀라서 내가 1주일을 누워 지냈다. ‘아, 나는 도저히 저리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과 한국 촬영 현장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일본은 스태프가 많이 챙겨준다. 배우들이 다른 생각을 안 하고 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한국은 대기 시간이 일본보다 훨씬 길다. 장점은 (출연진과 스태프가) 다 같이 만든다는 거다. 일본은 서로 서먹서먹하다. 일 때문에 만나고 있고 일 때문에 헤어진다는 느낌이 있다.
-일본 배우와 한국 배우의 차이는.
“연기에 임하는 태도는 큰 차이가 없다. 한국은 배우들끼리 금방 친해지고 잘 다가오는데 일본은 거리감이 있다. 한국은 형, 동생 하는데 일본은 서로 계속 존칭을 쓰니까 그런 듯하다.”
-최동훈 이준익 류승완 박찬욱 허진호 등 유명 감독들과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운이 좋은 거 같다. 감독님들의 색깔이 다 달라서 공부할 것이 굉장히 많다. 일본인 연기스승은 ‘내 주장을 내세우지 말고 감독의 스타일에 맡기라’고 가르쳤다.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분은 이정향 감독(‘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이다. 이 감독의 ‘집으로’를 보고 일본에서 펑펑 울었다. 가장 힘들 시기였다. 힘들 때마다 ‘집으로’ DVD를 빌려 계속 봤다. 지인을 통해 이 감독을 만난 뒤 문자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됐다.”
-일본에 학교 다닐 때 한국역사에 대해선 많이 배웠나.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를 다녀서 역사교육을 많이 받았다. 외조부께서 학교에 기부도 하고 지원도 하셨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몰랐다. 요즘은 조선학교에서도 배운다는데 내가 다닐 때는 배우지 않았다. ‘동주’ 출연 섭외를 받고 시집을 사서 읽고 자료도 찾았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고 충격이 컸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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