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은 결코 겸양의 언어가 아니다. 인종 차별 주제가 민감한 서구 사회에서 ‘I'm not racist, but~’으로 문장을 시작하면 오히려 그 다음에 인종 차별의 내용이 많아 더 얄미운 생각이 든다. ‘I'm not a racist but Hitler was right.’(제가 인종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히틀러가 옳았던 것 같습니다.)나 ‘I'm not a racist but we must ban all Muslims from entering this country.’(제가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이슬람교도들은 입국을 금지해야 합니다.)식의 ‘가면의 도입 어구’(apophasis)가 더 화나게 한다.
유사한 예는 상당히 많다. ‘I'm not sexist but~’(남녀 차별주의자는 아닙니다만) ‘No offense, but~’(악의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It would be unfair, but I could do~’(이런 말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I'm not prejudiced, but~’(제가 편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I'm not homophobic, but~’(제가 동성연애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모두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리는 신호인데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지탄받을 것을 모면하기 위해 위선적으로 문장 초입에 도입하는 말이다. ‘Not to be a dick, but~’의 어구도 마찬가지인데 dick은 본래 남성의 성기를 속어로 부르는 것으로 일상적으로 ‘비호감’ ‘멍청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 어구의 경우 ‘남들한테 비호감이 되지 않기 위해’ 라고 말하면서 다음에 비호감의 얘기가 이어진다.
내용은 좀 다르지만 사용법이 비슷한 경우도 있는데 ‘Pardon my French, but~’ 어구는 영국인들이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얘기로 ‘저의 이런 말씀을 이해하고 들어 주십시오’‘이런 말씀드리기 거북합니다만’의 뜻이고 부적절한 내용을 소개할 때 겸연쩍게 내뱉는 말이다. ‘I don't mean to change the subject, but…’하고 말을 했으면 주제를 바꾸지 않아야 하는데 도리어 주제를 바꾸면서 저런 말을 한다. 또한 ‘I don't mean to interrupt, but…’의 속뜻은 ‘끼어들어 말 좀 하겠는데요’의 의미가 된다.
‘I'm not X, but~’이든 ‘Pardon my French’이든 앞 단의 형식적 어구가 뒤 단의 본심 내용과 배치가 될 때 기분은 더 나쁘다. 위에서처럼 ‘저는 아닙니다만’ 어구로 책임을 모면하고 실제는 그 내용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apophasis, paralipsis)도 있고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려고 상대의 말을 먼저 인정하는 것(Synchoresis or Concession) 또한 모두가 수사법의 일부다. ‘Grammar is not that important but I have to mention your bad grammar’(문법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문법이 문제가 많네요)도 유사한 사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런 어구를 거짓말이나 자기 부정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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