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가 다시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시아파를 지지하는 시위대 수백명이 국회의사당을 점령하는 과격 시위에 나서면서 종파 갈등이 거세질 전망이다. 특히 이번 시위의 배후가 강경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48)로 알려져 시아파와 수니파, 쿠르드족이 정립(鼎立)하고 있는 이라크 사회의 핵분열도 우려되고 있다.
AP 통신에 따르면 30일(현지시간) 시아파 시위대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시내의 특별 경계 구역인 ‘그린존’으로 몰려가 장벽과 철조망을 무너뜨리고 의회에 난입했다. 그린존은 의회와 정부청사, 군 사령부, 외국 공관 등 주요 시설이 모여있는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의회를 점거한 시위대는 “정부와 정치권이 부정부패를 개혁할 의지가 없다”고 규탄했다. 이 과정은 시위대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이라크 전역에 생중계 됐다.
시위대 내부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일부는 의회 건물을 휩쓸며 집기를 파괴하고 의원들이 소유한 자동차를 부수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이라크 군경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했다. 미국 대사관 주변에서 허공에 대고 경고 사격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양측이 극단적인 폭력은 자제하며 사상자는 부상자 수십명에 그쳤다. 시위대는 6시간만에 의회 점거를 풀었지만 한동안 그린존을 떠나지 않고 농성을 계속하다 1일 오후 7시경 알사드르측의 공식성명과 함께 그린존을 빠져나갔다.
이번 시위는 전날 이라크 의회가 신임 장관 선임을 위한 투표를 정족수 미달로 무산시키며 촉발됐다. 시아파 시위대는 장기화된 경제난과 정치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며 지난 수개월 동안 반정부 시위를 벌여 왔다. 이에 따라 알아바디 총리가 3월 31일 장관을 전문 관료 출신으로 교체하는 ‘내각 개혁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개혁안이 통과될 경우 주요 직책에서 소외될 것으로 여긴 수니파와 쿠르드족 의원들이 개혁안 통과를 좌절시키자 시위대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시위의 방아쇠를 당긴 인물로 시아파 성직자 알사드르가 지목된다. 그는 이날 연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이 내각 개혁과 부패 청산을 하지 않으면 관공서를 쳐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아파 지지자들이 그린존으로 몰려갔다. 알사드르는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미국에 의해 축출된 후 반미 투쟁에 앞장서며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부상한 인물이다. 알사드르는 지난해부터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이라크 정국을 뒤흔들어 왔다.
특히 그의 정치 개입이 이라크 내 종파 갈등을 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이라크 정치 시스템은 미국에 의해 도입된 ‘통합 정부(natoinal unity)’체제에 따라 후세인 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인 수니파와 현 이라크 권력 실세인 시아파, 북부 쿠르드족이 주요 직책을 암묵적으로 나눠 맡아 왔다. 알사드르는 이 같은 ‘나눠먹기식’ 시스템을 부정부패의 원인으로 보고 개혁을 요구하고 있지만, 수니파와 쿠르드족은 알사드르가 자신들의 정치적 지분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반발하고 있다.
그린존 내에 본사를 둔 유엔이라크지원단(UNami)은 이날 사태에 대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라크 정부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가디언 등 외신들은 “이라크의 정국 불안이 미국과 이라크 정부의 이슬람국가(IS) 연합 공격에 차질을 줄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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