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재원마련 방식을 두고 한국은행과 정부가 연일 충돌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잇달아 한국은행에 발권력을 동원하는 ‘선별적’ 양적완화 조치를 요구하자, 한은은 ‘국민적 합의’라는 원칙론으로 맞섰다. 한은은 “기업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해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고 발을 빼면서 “그런데도 한은이 나서려면 먼저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거나, 정부가 지급보증 등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한은에 자료 하나 툭 던져놓고 참여를 강요하는 방식은 더 이상 안 된다는 뜻도 깔려 있다.
양측간 핵심 쟁점은 구조조정 재원을 누가 마련할 것인가이다. 현재 조선ㆍ해운사들의 빚이 90조 원에 육박한다. 해결을 미룰 경우 수만명 실직자가 발생할 수 있고, 이들 업종이 위치한 거제나 울산 등의 지역은 초토화할 것이다. 해결책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등 두 가지밖에 없다. 한은이 돈을 찍거나, 정부가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경예산 편성은 국회 동의를 얻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논의 과정에서 재정건전성, 증세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것도 부담이다. 그래서 자꾸 한은을 쳐다본다. 돈을 찍는 것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만으로 가능하니, 안이하게 손 쉬운 편법에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 한은은 특정 업종 구조조정에 중앙은행이 나서는 것이나, 국책은행 자본 투입은 유례가 없다는 입장이다. 양적완화의 효과에 대해서도 의문을 나타낸다. 더욱이 발권력을 동원하면 통화가치가 떨어져 국민의 지갑이 줄어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국민이 세금을 추가로 내는 것과 유사한 결과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통화정책은 보편성과 무차별성이 전제되는 곳에만 적용해야 형평성에 부합한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을 지원하면 이 같은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물론 발권은 최후의 보루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한은이 대안도 없이 책임회피에만 급급하는 것은 문제다. 구조조정은 발등의 불이다. 한은이 구조조정을 최대한 뒷받침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양적완화 말고도 한국은행이 쓸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있다. 금리를 더 낮출 여지가 있고, 과거 사례에 비춰 국공채를 사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선별적 금융지원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한은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추후 국민적 합의 여부에 따라 지원 방안을 보강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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