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을 꿈꾼 적은 전혀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을 TV앞에 끌어 모으던 스타 PD였으니까.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고,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MBC ‘PD수첩’을 이끌며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 검사와 스폰서의 유착 등을 파헤쳤던 최승호(55) PD가 감독이라는 호칭을 추가했다.
그의 감독 데뷔작 ‘자백’은 올해 전주영화제 최고 화제작으로 꼽힌다. 그는 EBS PD 출신 김진혁 감독이 해직 언론인의 고난을 묘사한 다큐멘터리 영화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등장인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제에 감독과 출연자로 각기 초청되는 매우 드문 영예를 안았다. 26년을 몸담았던 MBC에서 2012년 별다른 이유 없이 해직되면서 비롯된, 지독한 역설이다. 지난 31일 오후 ‘자백’의 첫 상영을 마친 신인 감독 최승호를 전주시 영화의거리에서 만났다.
‘자백’은 국가정보원의 간첩조작 사건을 고발한다. 탈북자 출신 공무원이었던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 공문서를 위조하고, 유씨의 동생을 폭행 고문한 국정원의 치부를 까발리면서 1970년대부터 자행된 ‘가짜 간첩 만들기’의 어두운 역사까지 들춰낸다. 유씨 사건이 일회성이 아닌, 국정원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역설한다. 최 감독이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 취재하고 방송한 내용을 뼈대로 만들어졌다. 국정원에서 의문 어린 자살로 생을 마친 탈북자 한준식씨, 1975년 학원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재일동포 김승효씨 등의 사연이 관객들에게 서늘한 기운을 전한다. 최 감독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국정원 조직과 보상을 노리는 직원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가짜 간첩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 감독이 영화 연출 동기에 대해 “인터넷 방송만으로는 사회적 문제 의식이 생기지 않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더 큰 그림을 그려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지만 “아직 영화인이라고 하기엔 부끄럽다”고 말했다. “데뷔작으로 영화제를 오다니 운이 매우 좋았다”면서 “큰 화면으로 관객과 호흡한 것은 정말 행복한 체험이었다”고 덧붙였다.
영화 속에서 최 감독은 신체적 위협을 무릅쓰고 취재원들에게 다가가 질문 공세를 한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책임을 끈질기게 추궁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최 감독은 “당사자의 답변을 들어야 하고 (혐의를)부인해도 그들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면이 있다”며 “힘들어도 숨 한번 크게 들이쉬고 접근해서 묻게 된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의 경우 김승효씨 취재를 위해 출국하다가 김포공항에서 우연히 조우한 뒤 카메라에 담았다. 최 감독은 “75년 간첩 조작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재일동포들에게 영상을 보여줬더니 다들 좋아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해직 뒤 뉴스타파 앵커로 일하고 있다. “제한 없이 방송하고 취재할 수 있어 좋지만 파급력이 강하지는 않아 아쉽다”고 했다. 공정보도를 외면하는 공영방송에 대해 쓴소리도 쏟아냈다. 그는 “정통 탐사보도가 사라져 권력에 대한 견제가 현저히 약해졌다”며 “공영방송이 똑바로 서지 않으면 국민이 불행하고 사회가 불행해진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버이연합과 전경련 유착 의혹을 예로 들며 “MBC는 아예 보도하지 않았고 KBS는 단신 처리했다. 예전처럼 ‘PD수첩’이 방송했다면 전경련이 저리 확인해줄 수 없다 식으로만 일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주=글·사진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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