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진한 기도는 한 편의 시가 됐다. 순명하겠다는 애끓는 고백이 읽는 이들의 폐부를 달궜다. 이해인(71) 수녀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톨릭출판사)를 내놓은 지 올해로 40돌을 맞았다. 예비 수녀시절, ‘이렇게 계속 써도 되겠나’ 싶어 보낸 시 10편을 본 홍윤숙 시인이 부산으로 달려가 출간을 권했다. 몇 부만 찍어 수녀원에서 돌려나 보자던 책은 가히 폭발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 복판에 꽂아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민들레의 영토’)
그 동안 문단이 시샘할 만큼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유명세를 치르느라 때로 힘든 적도 있었다. 박완서, 최인호 작가 등 각별했던 마음의 벗들을 여럿 떠나 보냈고 스스로도 크게 앓았다. 대장암 투병 중 난데없는 위독설, 사망설도 여러 번 겪었다.
초창기엔 “제발 시집 좀 안 팔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그를 지난 29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 올리베띠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은혜의 뜰에서 만났다. 평소 부산에 자리한 수녀회 본원에 머무르지만 다음날 예정된 강연 때문에 상경한 참이었다.
-어느새 40주년이네요.
“첫 책을 다시 보니 첫사랑 같으면서도 낯설고, 구절구절이 눈물 겹고 새롭더라고요. 시인 뿐 아니라 수도자로서 한 길을 걸어온 시간에 대한 감회도 새로워요. 쓸 때 막연하게 썼던 게 구체화돼서 말이 살아오고 의미가 새롭게 살아온달까요. 내가 시에 있는 세월을 살아내려고 노력했구나 싶어서. 이런 감회가 40년의 세월이 주는 선물 같아요. 수도원 자체가 민들레 영토가 됐다는 상징성이 각별해요.”
-특히 새로운 구절이 있습니까.
“오늘은 어제 보다 죽음이 한 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 주는 마음 (‘별을 보면’ 중). 스물 한 살에 쓴 시인데 지금 암환자로서 돌아보면 ‘내가 수도자로 이렇게 살고 있나’ 돌아보게 돼요. 어떤 환자 분이 매일 읽는다고, 기도가 된다 하더라고요.”
-죽음을 묵상하긴 이른 나이였는데요.
“그러게, 무슨 마음으로 이런 걸 썼을까. 스물 한 살 예비수녀가 아플 때도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한 번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묵상은 계속 했어요. 명상을 자주해서 사색의 깊이는 있었나 봐요.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썼지(웃음).”
-신앙의 영향이 컸을 것 같은데요.
“경건주의랄까.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고 그럴 때였어요. 초창기에 순결심, 초발심이 막 올라올 때라. 또 6ㆍ25가 일어난 게 여섯 살 땐데 ‘인생, 죽음, 이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줄곧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요. 다른 놀이가 없어 책을 많이 보기도 했고. 포격을 피해 방공호에 숨고,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피난 가던 기억을 지금도 꿈에서 만나요. 그런 게 수도생활을 택한 동기이기도 하죠. 한 번밖에 없는 생을 무엇에 걸 것인가.”
-첫 책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제발 시집 좀 안 팔리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믿거나 말거나(웃음). 수도생활을 해야 하는데 자꾸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생겨 수도공동체도 감당이 안되니 미안하고. 옛 수도자들이 책을 왜 익명으로 냈는지 절감했죠. 저도 모르는 제 출판물이 나오기도 하고.”
-왜 그리 반응이 컸을까요.
“투쟁하고, 끌려가고, 여러모로 살벌했던 80년대였는데 마음을 위로할 뭔가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닌데 고향 누나가 쓴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한 독자가 편지에 ‘(시가)한 집에 오순도순 살던 언니가 기숙사에 가서 내게 써서 보내 준 편지 같다고’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한 수감자는 ‘당장 샤워실에 가서 비누로 내 몸을, 내 때를 박박 닦고 싶다’고도 했고.”
-편지를 다 기억하시나요.
“87년부터 수녀원에서 오는 편지들에 답하는 편지사목을 했어요. 다만 한 줄이라도 써서 답해요. 그걸 통해 받는 분이 위안 받고 파급효과가 크다는 걸 느끼니까. 모은 편지가 지금 창고에 몇 십만 통 돼요. 중 2였던 원년독자가 지금은 아들을 군대도 보냈는데, 그 한 분이 보낸 것만 한 상자예요. 언젠가 한꺼번에 돌려주려고요. ‘당신의 성장과정입니다’하고요. 파킨슨병으로 돌아가신 한 독자 편지는 순서대로 정리해 남편께 드렸어요.”
-시가 맺은 인연이네요.
“40년 간 이 시들이 우정을 나누는 민들레 꽃씨 역할을 했네요. 저는 마더 데레사처럼 현장에서 가난한 이들의 몸을 닦진 못했지만, 그래도 시가 날아다니면서 위로와 희망의 씨를 전했다고 생각하면 힘들었던 부분들도 작은 위로가 되곤 해요. 감사한 일이죠.”
-‘작은’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시죠.
“수도회에서 늘 겸손을 가르치니까요.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보면 ‘사랑의 작은 길’이라는 말이 항상 나와요. ‘나는 작은 아이, 작은 자의 모습으로 그분께 간다’ 하는. 그런 영향으로 자꾸 반복적으로 쓰는데, 별로 작아지지도 않더라고요. 겸손은 그만큼 어려운 거죠.”
-늘 의연하려고 애쓰시는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암에 걸린 것을 안 걸린 것으로 할 순 없으니까 ‘여기서 선을, 유익함을 이끌어내려면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견뎌요. 시를 쓰거나 명상, 산보도 하고 클래식 음악도 듣고. 시에 등장하는 꽃, 나무, 바다, 산이 와서 나의 하소연을 들어준 거죠. 인간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했어요. 어머니에게서 받은 뿌리깊은 신앙심이 어떤 시련이 와도 믿는 구석이기도 해요. 그간에 다른 시련들도 산을 넘듯이 넘어왔으니.”
-건강은 어떠세요.
“통증 클리닉에 다니고 있어요. 나만 아픈 것은 아니니까 내 아픔을 객관화 시키면서 약 먹을 때도 예식을 하는 것처럼, 병원 갈 때도 소풍 가듯이 해요.”
-명랑투병이란 말도 만드셨는데.
“좋은 환자 되기 십계명이란 글도 썼어요. 내 아픔을 무기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 고통을 통해 다른 분들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긴다고 할까, 한편으론 선물 같아요. 기도를 건성이 아니라 더 간절히 하게 되고요. 거짓말처럼 투병하면서 한 번도 눈물 흘린 적이 없어 스스로도 신기해요. 다른 분들이 ‘아무래도 체면 때문인 것 같으니까 아무도 없을 때 성당에서 실컷 울라’고 해서 가봤는데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수녀님들이 보기와 달리 담대하고 여장부 같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최근까지도 마찬가지인가요.
“나를 위해서는 눈물이 안 나요. 세월호 부모님들 생각하면서 운 것 빼고는.”
-왜 타인을 위해서만 눈물이 날까요.
“신적 존재에 대한 수직적인 믿음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에요. 이걸 간과하고 위쪽으로만 잘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죠. 평범한 일상 안에서 비범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참 신앙인이에요. 기도만 열심히 하면서 이웃과는 불목해선 안되죠. 특히 약자들을 내 친지처럼 여겼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남과의 비교에서 불행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 치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 주는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닌가. 여행도 좋지만 떠나기 전에 독서여행, 사색여행, 기도여행 등 내면의 여행을 부지런히 하고 나서 그 보상으로 여행, 순례를 가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현대인은 골방의 영성을 잃어버렸다’는 파스칼의 말을 자주 떠올려요. 늘 안으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 고요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야죠.”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