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용 변경 후에도 제재 안해
잇단 증상에 5년 뒤에야 역학 조사
부처 책임 떠넘기나 또 2년 낭비
옥시 “아이에도 안전” 국가인증 마크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살생물제(殺生物劑) 사건이다. 미생물이나 해충을 죽이려고 사용한 제품이 외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다.” 살균제 가습기 조사를 위해 보건복지부가 민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꾸린 폐손상조사위원회가 2014년 12월 발간한 200페이지 분량의 ‘가습기 살균제 건강피해 사건 백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해충을 죽이기 위한 독성물질이 대체 어떻게 사람에게 뿌려지게 됐을까. 그것도 가장 약자인 아기와 임산부에게, 10년 동안이나. 참사는 20년 전 잉태됐다.
‘살인 살균제’의 탄생
가장 많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낸 옥시레킷벤키저(옥시)는 2001년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라는 물질을 넣은 가습기살균제 신제품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내놨다. 기존 제품의 성분(프리벤톨 R80)은 부유물이 생기는 단점이 있어 성분을 바꾼 것이다. 옥시가 넣은 PHMG는 공업용 살균제였다. 이 물질을 개발한 SK케미칼은 1996년 항균 카펫 제조 시 첨가제 용도로 환경부에 유해성 심사를 신청했다. 환경부는 사람이 코로 마셔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지를 검사하는 ‘흡입독성시험’도 거치지 않은 PHMG를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정했다. 5년 뒤 이 물질이 원래 용도와 달리 가습기 살균제에 쓰일 때 역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물질의 사용 용도를 변경할 때 다시 유해성 심사를 받아야 하는 규정이 당시에는 아예 없었다.
정부가 이토록 안이할진대 기업은 더했다. 검찰조사에 따르면 당시 옥시 내부에서 ‘PHMG에 대한 흡입독성시험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어느 단계에선가 묵살됐다. 검찰은 옥시가 수 억원에 달하는 실험 비용을 아끼고, 신제품 출시를 앞당기기 위해 실험을 생략한 것으로 보고 있다. SK케미칼이 1999년 특허청에 제출한 특허출원서에는 PHMG의 유해성이 언급돼 있는데, 가습기 살균제로 사용하겠다는 업체에 원료를 납품하면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도 검찰 수사 대상이다.
그런데도 옥시는 제품 앞면에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하여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도 안심’이라고 적었다. 일부 제품에는 안전 기준 등이 적합하다는 것을 국가가 인증하는 ‘KC마크’가 붙어있었다. ‘살인 살균제’는 이렇게 우리의 안방으로 성큼 들어왔다. 2000년대 초 가습기는 임산부가 있는 집의 필수품이었고, 노부모님을 위한 단골 효도선물이었다.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세균의 온상이 된다는 우려로 가습기 살균제도 함께 인기를 얻었다. 옥시 제품이 인기를 끌자 홈플러스와 롯데마트도 주성분을 그대로 베껴 각각 2004년, 2006년 제품을 출시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연간 약 60만개가 팔렸고, 첫 제품이 나온 1994년부터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2011년까지 약 800만명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한 기업, 국민의 안전 보장을 제 사명으로 여기지 않은 정부의 무책임, 그로 인해 눈앞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다를 바가 없다.
정부 부처 2년 간 책임 떠넘기기
비극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의사들이었다. 2006년 3월 서울아산병원 소아중환자실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호흡부전증 환자 3,4명이 동시에 입원했다. 이에 서울아산ㆍ서울대ㆍ삼성서울ㆍ연세대 병원 등 4개 병원 소아청소년과 의료진이 모여 원인 규명을 논의했고, 이들은 전국의 소아 급성 폐렴 사례를 조사해 2008년, 2009년 대한소아과학회에 논문도 냈다. 이 조사에는 질병관리본부(질본) 담당자도 참여했지만 ‘감염병은 아니다’라고 밝히는 데 그쳤을 뿐, 정부 차원의 별도 조사는 하지 않았다.
5년 후인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 임신부 환자 7명이 입원한 후에야 정부가 움직였다. 그 해 8월 복지부의 역학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폐 손상의 원인은 가습기 살균제. 살균제를 사용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폐손상 발생 위험도가 47.3배나 높았다. 환자들은 평균 3,4년 동안 겨울철 한 달 평균 1병 정도의 살균제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진 동물 실험에서도 인과관계가 입증됐다.
피해자들은 이제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구제가 시작될 줄 믿었지만 첫 단추인 피해 조사를 시작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화학물질은 환경부, 건강 피해는 복지부, 공산품 관리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여러 부처에 걸친 문제라 부처가 서로 책임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논란 끝에 2012년 12월 질본에 전문가들로 구성된 폐손상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화학물질에 따른 건강 영향조사는 환경부 소관이라며 복지부가 검사 지원을 거부하면서 민간 위원들이 전원 사퇴하는 등 혼란이 계속됐고, 결국 2013년 7월에야 조사가 시작됐다. 위원장이었던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피해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정부 부처가 한 곳도 없었고, 부처 간 업무 조정도 안 됐다”고 말했다.
사법당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해자들은 2012년 8월 옥시 등 살균제를 생산ㆍ유통ㆍ판매한 10개 업체를 과실치사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지만, 보건당국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한다며 1년간 수사를 하지 않고 방치했다. 정부가 지금까지 가해 기업들에게 내린 처분은 제품 용기에 ‘안전하다’고 허위로 표시한 데 대한 과징금 5,200만원이 전부다.
증거인멸, 이메일 사과… 참기 어려운 후안무치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불거진 후 옥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과가 아닌 주식회사를 유한회사로 바꿔 새 법인을 세운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후 대학의 인과관계 연구 결과를 왜곡하고, 유리한 결과만 발췌해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에는 폐 손상이 황사와 꽃가루 때문이라는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해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안전하다는 허위 표시에 대해 정부가 물린 과징금 5,000만원에 대해서도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내는가 하면, 5년 만의 사과문은 달랑 이메일 한 통이었다. 옥시의 후안무치의 끝이 과연 어디일지 국민들은 아연할 따름이다. 정부 역시 지난해 말 3차 조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피해 신청을 받지 않다가, 최근 여론이 거세지자 부랴부랴 4차 조사 신청을 개시했다. 폐 이외 질환에 대한 조사와 가습기 살균제 주요 성분에 대한 독성 연구 등 산적한 과제에 대해선 29일에야 일부 대책을 내놨다.
지난 5년 간 변한 건 거의 없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절규도 여전히 똑같다. 2009년 다섯 살 아들을 잃은 김덕종(40)씨가 말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업체와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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