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기 군(11)의 시간은 남들 보다 약 6배 빠르게 흐른다. 홍 군은 소아조로증(Progeria)환자다. 다 자라기도 전에 늙어 소년의 나이에 죽음을 맞아야 하는 병을 앓고 있다. 길어야 17세까지 살 수 있는 병이라고 한다. 소년의 노화는 이미 시작됐다. 키 104cm에 체중이 14㎏ 밖에 안 나가는 홍 군의 피부는 노인의 살갗처럼 얇고 주름졌다. 부러질 듯 얇은 팔과 다리에 걷는 모습도 구부정하다. 머리카락은 나지 않아 밖에 나갈 때는 주로 모자를 쓴다. 열한 살 소년의 생체 나이는 약 65세다. 홍 군이 앓고 있는 소아조로증은 400만~800만분의 1의 확률로 발병하는 희귀 병이다. 그는 국내에서 소아조로증으로 확인된 유일한 환자다.
내달 23일 MBC ‘휴먼다큐 사랑’에서 소개될 ‘시간을 도둑 맞은’ 홍 군의 삶(‘시간을 달리는 소년 원기’)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소년과 그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28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휴먼다큐 사랑’ 간담회에서 일부 공개된 촬영분을 보니 홍 군과 가족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년 원기’를 제작한 조성현 PD는 “처음엔 그 가족의 웃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황당했다”고 말했다.
“집에 갔는데 아이 엄마랑 아빠가 원기랑 같이 막춤도 추고 놀더라고요. 아빠는 원기가 짝사랑하는 아이 코스프레(흉내)도 하고요. 처음엔 ‘아이한테 무슨 짓인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물었더니 ‘아이가 언제 우리 곁을 떠난다 해도 웃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가족들이 힘든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인 거죠. 나중에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더 슬펐어요. 편집하면서도 많이 울었고요”(조 PD).
홍 군과 그의 가족의 모습과 더불어 제작진이 보여줄 ‘사랑’ 얘기는 총 5편이다. 5월 매주마다 한 편 씩 전파를 탄다. 별거 40년 째인 배우 엄앵란과 신성일의 얘기(‘엄앵란과 신성일’·5월2일)로 시작해 치매(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내를 간호하는 60대의 노부부 얘기(‘러브 미 텐더’·5월9일)로 이어진다. 그간 프로그램이 죽음을 앞둔 일반인의 삶에 집중했던 것을 고려하면 ‘엄앵란 신성일’ 편은 다소 튄다. 신성일의 불륜으로 두 사람이 별거 중이란 얘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새롭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를 두고 ‘휴먼다큐 사랑’ 제작을 총괄한 김진만 PD는 “치매로 고통 받는 노부부 얘기 보다 엄앵란 신성일 부부의 얘기가 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엄앵란 신성일 부부의 진정한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엄앵란 선생님께서 암 진단을 받게 되면서 변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았고요. 시간을 통해서 되찾는 가족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기획의도와 잘 맞았죠. 정말 두 분은 극과 극의 성격을 지닌 분이셨죠. 신성일 선생님이 처음으로 엄앵란 선생님께 ‘미안하다’는 말도 하셨고요. 집을 나가 경북에서 혼자 지내시는 신성일 선생님이 엄앵란 선생님 투병을 계기로 어떻게든 집에 들어오려 하시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 보통 부부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죠”(김 PD).
제작진이 가장 오래 준비한 기획은 탈북자 모녀 얘기(‘내 딸 미향이’·5월16일)다. 제작진은 이 모녀의 모습을 무려 3년에 걸쳐 카메라에 담았다. 역대 ‘휴면 다큐사랑’ 가운데 가장 긴 제작 기간이다. 탈북해 중국에서 숨어살 다 라오스와 태국 등을 거쳐 한국에 온 여정을 비롯해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딸 미향이의 스위스 입양과 현지 생활 등을 모두 담아서다. 친 엄마에 “왜 날 입양 보냈어”라고 묻는 미향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나오자, 간담회 현장에서는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터졌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된 뒤 25년 만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기적적으로 만난 두 자매의 한국 엄마 찾기 여정(‘사랑하는 엄마에게’·5월30일)도 전파를 탄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 등에 출연해 미국에서 할리우드 배우로 성장한 사만다 푸터먼과 프랑스에서 패션디자이너로 성공한 아니이스 보르디에 자매 얘기다. 두 사람의 기적적인 만남을 책 ‘어나더 미’와 다큐멘터리 등에 담아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이들이다. ‘사랑하는 엄마에게’를 연출한 이모현 PD는 “애초 2014년에 두 자매를 섭외하려 했는데, 마침 두 자매가 직접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해서 뒤늦게 섭외를 한 케이스”라며 “기존 다큐멘터리에 없는 두 모녀의 서울에서의 친모 찾기가 이번 편의 포인트”라고 말했다.
‘휴먼다큐 사랑’은 지난 2006년 ‘뻐꾸기 가족’편을 시작으로 고통의 순간에서 가족을 바라보며 삶의 행복을 채워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담아왔다. 올해로 11주년을 이어오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평균 시청률 10%대를 오가며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다. 김 PD는 “지난해 10주년을 끝내고 ‘휴먼다큐 사랑’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가치가 있는 지를 고민 많이 했고, 어렵게 시작해 ‘무한도전’처럼 11주년을 맞이 하게 됐다”고 프로그램의 새 출발을 앞둔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요즘 다들 너무 살기 힘들어 해 마음껏 울게 해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비극을 통해서가 아니라 희망의 눈물을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 줘 희망을 주고 싶었다”는 기획의도도 들려줬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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