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말하기 전까지 헬멧 벗지 말라고 했지! 저 놈들이 내뿜는 프로메카안드로콰이트 텔레파시를 차단하기 전까지 절대 벗어선 안 돼.”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겠다는 신념의 사나이, 병구가 삐에로 복장의 순이를 다그친다. 두 사람은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을 납치해 강원도 태백 은신처로 데려온 상태. 강 사장을 안드로메다 PK-45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 여긴 그들은 “개기 일식 때 외계 왕자와 접선할 장소를 자백하라”며 고문을 자행한다. ‘나는 나의 아내다’ 등에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준 지현준이 꽃무늬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망가진 얼굴로 무대를 누빌 때, 털이 무성한 다리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못지 않은 동작들을 선보일 때 객석에서 연신 웃음이 터진다.
지난 9일부터 시작한 연극 ‘지구를 지켜라’(5월 29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는 2003년 개봉한 동명영화를 줄거리로 삼은 창작극이다. 원작의 유명세 외에 그룹 샤이니의 키, 강필석 등 공연계 스타들이 줄줄이 ‘B급 병맛 연기’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공연 66회 중 25회가 매진을 기록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를 원작으로 한 연극과 뮤지컬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 2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뮤지컬 창작산실에서 선보인 ‘안녕! 유에프오’, ‘신과 함께 가라’를 비롯해 연극 ‘아들’(6월 7일~7월 24일 아트원시어터), 뮤지컬 ‘국경의 남쪽’(5월 31일~6월 12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연극 ‘장수상회’(5월 5~29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등이 줄줄이 초연을 앞두고 있다.
영화를 각색한 창작공연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제작진들은 ‘원작의 매력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극 ‘아들’의 프로듀서인 정용석 티앤비컴퍼니 대표는 “시나리오 집필 단계에서 무대 위에 올렸을 때의 모습을 그려가며 쓰이기도 해서 대본 자체가 완성도가 높았다”며 “감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인트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소설이나 웹툰, 영화 등 다른 장르 작품을 원작으로 한 공연의 흥행도 이유로 꼽힌다. 연극 ‘장수상회’의 전용석 프로듀서는 “2008년 강풀 웹툰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연극으로 제작하면서 전 세대가 공감하는 작품으로 성공해 보람을 느꼈다”며 “영화 ‘장수상회’ 제작 당시 줄거리를 듣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작품이란 확신에 무대화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영화 원작의 공연이 유행하는 건 세계적 추세라고 말한다.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복고 열풍과 맞물리며 이미 웨스트앤드, 브로드웨이 신작의 8, 9할은 영화를 원작으로 한 ‘무비컬’ 또는 히트곡을 토대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며 “한류 열풍, 원소스멀티유즈가 각광받는 국내 콘텐츠 제작 환경에서 이런 기류에 합류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비싼 티켓 가격을 지불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 관객의 심리, 이미 대중성을 인정받은 콘텐츠의 재활용을 반기는 제작사들의 계산도 이런 유행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하지만 영화를 원작으로 한 국내 창작 공연 중 살아남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원작의 유명세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영화를 단순히 무대에 재현하는 데에 그친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 교수는 “무비컬을 만들 때 포인트는 원작이 얼마나 유명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재가공하느냐다.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흥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제작사들도 직간접으로 체험한 결과가 올해 들어 각광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초연 작품 중에는 원작을 시대에 맞춰 수정하거나, 참신한 무대기법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연극 ‘지구를 지켜라’대본을 쓴 조용신 뮤지컬평론가는 “영화 속 병구의 은신처를 채웠던 마네킹 등 독특한 미장센은 연극에서 대부분 영상으로 대체하거나 간소화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지휘한 이지나 연출가 역시 시대 상황에 맞춰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며“최근 사회 이슈를 살짝 심어 놓았다. 정치가로 바꾼 것은 요즘 우리 국민들 불신의 최전방에 정치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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