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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일가

입력
2016.04.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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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4월 28일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1957년 5월 경무대. 연합뉴스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1957년 5월 경무대. 연합뉴스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후계를 꿈꾸던 이기붕(1896~1960)과 박마리아(1906~1960), 차남 이강욱(당시 연세대 2)이 1960년 4월 28일 장남 이강석(당시 24ㆍ육군 소위)의 45구경 권총에 맞아 숨졌다. 이강석도 자살했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 발표 사흘 뒤였다.

고학으로 어렵사리 미국 유학을 마친 이기붕은 해방 전 국일관 지배인과 다방 경영, 광산업 동업 등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잇달아 실패했다. 해방 후 군정청 통역관이 됐고, 유학시절 안면을 익힌 이승만이 45년 10월 귀국하자 첫 거처인 돈암장으로 그를 찾아가 집사 일을 자청했고,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시장(49~51년), 국방장관(51~52년), 대한체육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초대 의원, 51년 자유당 창당 후 부당수, 중앙위 의장, 국회의장, 부통령. 50년대 중반 무렵 그의 권력은 이미 ‘서대문 경무대’로 불렸다.

이기붕의 배후에는 야심과 기량 면에서 이기붕을 압도했고, 또 그를 선도했다는 박마리아가 있었다. 그는 홀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해주던 한 목사의 눈에 들어 학교를 다녔고, 고교 동창회의 도움으로 이화여전을 나왔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뒤 이화여전 강사로 일했다. 그는 35년 역시 미국서 만나 알고 지내던 이기붕과 결혼했고, YWCA에 적을 두고 김활란 등과 함께 징병 독려 등 친일 활동을 벌였다.

그는 영어에 능통한 데다 해방정국의 다른 정치인 부인들과 달리 권력 앞에 한없이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의 권력의 원천은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였다. 46년 이화여대 교수, 대한부인회 회장, 이대 문리대 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 대한여성회장. 이대 동문회와 이대 출신 사조직 ‘이수회’를 이끌며 정ㆍ관계와 군부 이대(부인) 인맥을 구축했고, 그렇게 마련한 자신의 권력을 이범석 윤치영 등 이기붕의 정적 제거와 출세 길 개척에 활용했다.

부부는 57년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에게 양자로 보낼 만큼 권력에 탐닉했고, 이강석에게는 물려받은 야심과 권력 외에 실탄이 든 총이 있었다. ‘개척’의 노고 없이 세습된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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