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초록이 몽글몽글 피어 오른다. 초록 그 하나에서 만가지 색이 뿜어져 나온다. 가히 꽃보다 신록이다. 흰색에 가까운 담록부터 상록수의 짙은 초록까지 푸름의 넓은 스펙트럼이 산하를 뒤덮으며 조화를 부린다.
신록은 여려도 강하다. 지난 밤 폭풍 같은 비바람에 꽃잎은 떨어져도 새순의 신록은 가지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아니 그 가지가 신록을 붙잡고 견뎌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삶도, 세상도 어린 싹들이 커가는 힘에 기대 버텨내고 있지 않은가.
부안댐 입구의 벼락폭포
칠산 앞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온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내변산의 뭍과 외변산의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 중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마침 부안을 가려는데 전날부터 큰 비가 내렸다. 봄비 치고는 꽤 많은 양이었고 바람도 거셌다. 꽃잎이 버티긴 힘든 비바람이었다. 봄비 속을 달리는 길, 제일 먼저 궁금한 곳은 부안의 벼락폭포였다. 새만금방조제 인근 부안댐 직전의 작은 하천 옆에 있는 풍경이다. 개인적으론 변산에서 제일 멋진 곳 같은데, 이제껏 제대로 된 이름이나 스토리도 없이 홀대 받아온 풍경이다. 이곳의 벼락폭포는 비가 와야 보이는 물줄기다. 빗속을 뚫고 먼저 달려간 것도 그 폭포 줄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폭포에 이른 건 비가 그칠 무렵. 차를 세우고 그 풍경과 마주한 순간 얼어붙는 줄 알았다. 눈 앞에 현실 같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화첩에서나 가능한 선계(仙界)의 풍경인 양 눈이 어지럽다.
직소천 너머 기암 절벽을 타고 안개는 피어 오르고, 짙은 나뭇가지 끝에 새순의 여린 초록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잎이 아니라 연둣빛 꽃송이 같다. 병풍을 두른 듯 늘어선 기암절벽의 바위산 중턱에서 물기둥이 울컥 토하듯 뻗어 나온다.
시선을 쉽게 거두기 힘들었다. 오랜 시간 카메라 셔터만 터뜨리고 있는데 그 사이 하늘이 환해졌다. 어느 순간 잔잔해진 직소천 위에 꽃과 신록, 기암의 황홀한 풍경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멈추고 시간마저 정지한듯한 그 순간, 물이 캔버스가 되어 풍경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황홀한 데칼코마니. 마주한 풍경의 감동은 2개의 그림 이상으로 증폭된다. 지금의 저 풍경이 수면이 찍어낸 찰나의 풍경이란 말인가. 혹시 변산의 산하가 오랜 시간 한 점 한 점 공들인 붓놀림으로 완성시켜 꼭꼭 숨겨뒀던 것은 아닐까. 모든 게 멈춘 그 순간, 수면 밑에 숨겨뒀던 화폭을 잠시 밖으로 펼쳐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계폭포와 직소폭포
변산을 찾는다면 내변산을 관통하는 내변산로(736번 지방도로) 드라이브를 놓치지 말기를. 몽글몽글 피어난 신록과 기암의 조화에 기분이 둥실 떠오른다. 마치 동양화의 화첩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길이다.
이 길가 부안청림천문대 옆으로 보안면 우동리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그 길의 끝 무렵 또 하나의 ‘비오면 폭포’를 만날 수 있다.
반계 유형원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발자취가 서린 유서 깊은 마을 우동리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폭포다. 우동저수지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이 폭포의 이름은 선계폭포. 거대한 기암 병풍 사이에서 우람한 물줄기가 뻗어 내려온다. 폭포를 만든 기암의 아래는 거대한 솔숲이다. 선계폭포의 풍경이 물에 녹아들 때 쭉쭉 뻗은 적송의 짙은 초록은 저수지에 비친 폭포의 하얀 물줄기와 야들야들한 신록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저수지 뒤편의 작은 마을은 그림책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불쑥 솟은 기도원 첨탑이 그 풍경을 훼방 놓는다. 황홀한 풍경에 금이 간 듯, 많이 아쉽다.
내변산 중심에도 빼어난 폭포가 있다. 변산을 대표하는 절경인 직소폭포다. 이 폭포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걷는 것이다. 직소폭포까지 2.2㎞가량 완만한 숲길이 이어져 있다. 20분쯤 들어가면 자연헌장기념비를 지나 직소보의 시원한 풍광이 펼쳐진다. 과거 부안의 식수원 역할을 했던 저수지다. 명징한 물가를 따라 나무데크의 길이 이어진다.
봉래구곡의 길이다. 물거품이 마치 물이 끓는 듯해 보이는 선녀탕과 계단 폭포인 분옥담을 지나면 직소폭포를 마주할 수 있다. 거대한 암벽 사이로 30m의 두툼한 물줄기가 장쾌하게 떨어진다. 주변의 넉넉한 산세를 함께 물기둥에 녹여내는 풍경이 금강이나 설악의 폭포들과 겨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세찬 폭포수 속에 춘변산의 절정이 녹아 들고 있다.
부안=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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