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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충고 지시 자제하면 노인 위상 지킬 수 있다

입력
2016.04.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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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찾아 오지 않아 외롭다고 느끼는 부모는 자기 자식을 제소할 수 있다, 판사는 사정을 파악해 자식에게 부모방문을 명령할 수 있다, 법원명령을 받고도 부모를 찾지 않는 자식은 금융거래상 문제가 없어도 신용등급이 떨어지게 된다”라는 ‘효도 조례’가 중국 상하이시에 생겼다고 한다. 그 옛날, 우리 할머니말투를 흉내내자면 참으로 별난 세상이 되었다. ‘국가가 자식들이 부모 찾아가는 일에 까지 개입하다니’라고 생각하다가 ‘오죽하면’하는 씁쓰레한 생각에 이르고 만다

아무리 자식이 괘씸하기로서니, 재판정에까지 자식을 끌어내야 하는 건가. 재판정은 고사하고, 정말 해야 할 말도 다 뱉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데. 오죽하면, 내 선배는 병원에 갈 때마다 노인이 하는 그렇고 그런 수다로 취급 당하는 게 싫어 종이에다 병력과 증상과 복용약을 정연하게 써서 의사에게 말없이 내민단다. 그러면 의사는 말로 증상을 설명할 때보다 진지하게 내민 종이를 다 읽고 나서 “말씀을 못 하시는군요”라고 되묻는데, 그때 “아뇨, 말은 청산유수올시다” 이렇게 대답하고 나면, 훨씬 정중한 대우와 정밀한 진찰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왜 이리도 노인들의 말 값이 떨어졌을까. 얼마나 부모 말을 안 들었으면 자식을 고소까지 할까. 사실 나도 어미로써 자식들에게 할 말을 다 못하고 산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은 “말 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 할 수 있고,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지만, 요즘 세상에, 더구나 우리 늙은이들이 말 할 수 있는 것을 어찌 다 명료하게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일찍이 이런 난처한 상황에 대해 스위스 의사이자 상담사 폴 투르니에는 ‘노년을 맞이하며’라는 책에서 그 해법을 제시했다. 먼저 늙었음을 자인했다면, 그 때부터는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틀, 시쳇말로 해서 삶의 패러다임을 바꿔보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세상사 즉 돈 벌고 자식 키우고 출세하고자 하는 그런 잡사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잡다한 이해관계를 떠나, 보다 차원 높은 쪽으로 관심의 초점을 맞춰 보란다. 이렇게 맘을 한 번 돌려 먹기 전에 전제할 것이 있으니, 바로 지금까지 연장자로써 누리던 권력이나 권위를 내려 놓으란다. 권력의지와 명령권을 거두어 드리라는 거다. 젊은이들을 만났다 하면, 지시하고 가르치고 충고하는 ‘이건 이런 법이다’ 같은 말투를 접으란다. 요즘 세상에 우리 노년들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뭐 있는가. 손가락 한번 누르면, 우르르 쏟아지는 게 세상의 온갖 지식이다. 이제 세상은 노인의 지혜나 지식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70대 이상 노인의 사회적 위상을 나라별로 비교하면 우리나라가 매우 낮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우리나라 전체 연령대가 평가한 70대의 사회적 위상은 4.38(10점 만점)으로 OECD 평균 5.27보다도 한참 낮다. 독일 미국 일본보다 낮다. 특히 20대가 3.21점으로 가장 야박했다.

이 같은 노인에 대한 낮은 평가는 “노인들의 가르침 = 잔소리”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 전반적 분위기도 물론 책임이 있다. 하지만 4월 20일자 한국일보 칼럼에서 박진 교수가 어른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장려하는 풍토가 자기 책임 하에 창의적인 역량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돼 왔다고 한 지적도 타당하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창의력과 혁신을 도모하도록, 이제 그만 상명하복 문화는 길을 양보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은퇴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로만 삶을 다시 건축하는 멋진 시간이다. 권력의지며 명령하려는 생각은 다 버리되, 오로지 늙도록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정서적인 권위다. 이것만은 지키고 있어야 하리라. 비록 행동의 세계는 사라졌지만, 존재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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