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28일 새벽 1시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투루판. 답사길에 만난 일행 8명이 야시장에서 양꼬치에 칭다오맥주를 나눠 마시다 택시 두 대를 타고 돌아온 시각, 숙소 앞은 전쟁터였다. 여러 대의 군용트럭에서 쏟아져내린 군인들이 숙소 바로 앞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고, 현장지휘관인 듯한 사내는 민간인들에게 “회이취”(돌아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한밤에 숙소를 놔두고 돌아가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실크로드는 낭만의 답사길이 아니라 목숨을 내건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과거완료형이면 좋았을 법한 이 길은 아쉽게도 현재진행형이었고, 날짜를 잘못 선택한 탓에 가장 살 떨리는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짐은 있었다. 이틀 전인 6월26일 투루판 산산에서 웨이우얼족이 공안국을 침입, 3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국 포털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는 웨이우얼족이 칼을 들고 난입했다고 나와 있었다. 대명천지에 웬 칼? 한족 운전기사와 조선족 가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이드는 2009년 7월5일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광둥성 완구공장에서 발생한 한족과 웨이우얼족 간의 민족갈등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주도인 우루무치로 불똥이 튀었다. 며칠 사이에 세상이 몇 번 바뀌면서 197명이 숨지고, 1,700여 명이 부상했다. 당시 우루무치에서 석달동안 집안에 박혀 숨어있었다는 가이드는 사상자 수가 훨씬 많다고 몸서리를 쳤다.
바로 7ㆍ5사태를 앞두고 무력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공안국 침입을 신호탄으로 하루 뒤인 27일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오아시스도시 호탄에서 웨이우얼족 수백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기습시위를 감행했고, 우루무치 바자르(시장)에서는 공안 2명이 습격을 받아 숨졌다.
그런 난리통에 우리는 야시장 구경하고 오다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 낯선 땅의 흥분이 공포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숙소 근처에서 큰 사건이 난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바리케이트 뒤쪽 10분 거리에 웨이우얼족이 운영하는 야시장이 하나 더 있었다. 한족과 웨이우얼족이 총칼 들고 맞붙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지 갑갑했다. 점점 거리에 불이 꺼지고 야시장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조마조마했던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돌아갔다. 우리 일행의 통금도 풀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머리칼이 곤두섰다. 가로등도, 택시도, 빛이라고는 없었다. 암흑속으로 빨려들어간 10분이 그렇게 길 줄은 몰랐다. 굳게 닫혀있는 숙소 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질러 대문이 열린 순간 다리가 풀려버렸다.
투루판은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인 ‘서유기’의 도시다. 7세기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북인도에서 대승 불전을 구한 당나라 현장스님의 실화에 바탕을 둔 책과 도시다. 버스가 투루판에 접어들자 눈동자가 이상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로 구워낸 것 같이 붉은 빛깔의 산,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열기를 식혔다는 ‘화염산’이었다. 동서로 98㎞, 폭은 9㎞, 정상은 831.7m라고 한다.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화염산 끝자락에는 베제클릭 천불동이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의 이 천불동은 애석하게도 도난과 약탈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굴마다 뜯겨나간 벽화의 자국이 선명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 오렐 스타인, 독일 폰 르콕, 프랑스 폴 펠리오, 미국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니 백작 등이 약탈의 주범이다. 헤딘과 스타인은 약탈의 공로로 자국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았으니 제국주의의 논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나라도 직접 약탈 대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오타니컬렉션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미술품 1,700여 점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타니가 조선의 채광권을 얻기 위해 서울에 사는 일본인에게 유물을 넘기면서 결국 이 박물관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오타니컬렉션은 일본 도쿄와 서울, 중국 뤼순으로 흩어졌고, 뤼순의 수집품은 2차대전 후 행방이 묘연하다.
투루판의 명물은 또 있다. 실크로드의 대표 과일은 포도다. 그런데 비는 오지 않고 온통 사막 투성이인 이곳에 포도는 어떻게 주렁주렁 터널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카레즈’ 덕분이다. 2,000년이 넘은 카레즈는 천산의 만년설에서 도심 지하에 거미줄처럼 5,000여㎞나 깔려있는 인공 지하수로다. 만리장성, 남북대운하와 함께 중국 3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높이 90㎝, 폭 60㎝의 카레즈는 모두 수작업으로 팠다. 암반을 만나면 돌아가야했고, 측량이 잘못되면 다시 파야했다. 무른 지반을 만나 흙더미가 내려 앉으면 카레즈는 바로 무덤이 됐다.
건조한 지역에는 지하수가 생명수이기는 하다. 이란에서는 까나트, 아프가니스탄은 카레즈, 시리아는 호가라로 불리는 지하수로가 있다.
같은달 29일 이국적인 느낌의 투루판을 지나 우루무치로 들어오니 도시 곳곳에 소총을 든 무장경찰들이 분대 단위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 동네 민족갈등이 이방인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시진핑 중국 주석도 당근과 채찍을 모두 동원해보지만 큰 효과는 없다. 2014년 4월 시 주석이 신장을 방문했을 때도 한족 관리가 3명이나 살해당했고, 폭발사고도 연달아 발생해 수십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759년 청나라에 복속된 후 독립전쟁이 끊이지 않던 웨이우얼족 입장에서 보면 중국 정부의 처우가 떡고물 던져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중국은 중국대로 신장 지역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솔로몬의 지혜가 아쉽다.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의 우루무치는 남북으로 갈려 있었다. 도시 북쪽은 한족, 남쪽은 웨이우얼족 동네다. 10여 년 전 인구가 200만에 불과했을 때 웨이우얼족 70%, 한족이 20% 정도였으나 중국의 이주정책으로 상황은 역전됐다. 인구 350만명에 한족이 75%나 되는 것이다.
이날 우루무치 천산산맥 북쪽의 한 목장에서 말을 타다 한족 부부가 운영하는 가정식 식당을 찾았다. 서른 안팎의 부부가 참 밝았다. 주인 친구들이 찾아와 마당에서 수박을 먹으며 얘기꽃을 피운다.
겉으로는 너무나 평화로운 우루무치지만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인화성 높은 도시다. 밤 비행기로 우루무치를 떠나면서 한족 부부도, 웨이우얼족 야시장 주인도, 조선족 가이드도 모두 무탈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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