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수백 만원에 달하는 가방 혹은 시계를 사려고 한다. 이것이 합리적 소비가 아니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하여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논리가 동원된다. “이것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준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다!” “그저 그런 물건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느니 최고의 물건 하나를 갖는 게 낫다.”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내 판명된다. A는 사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실밥이 뜯어진 퀼팅 핸드백에 분노하고, B는 시간오차가 수용할 수 없는 범위까지 벌어진 기계식 시계에 대한 불만을 떨치지 못한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C의 할리우드 여배우 이름이 붙은 가방은 너무 낡아 후줄근하다. 아무리 비싸고 좋아도 물건은 그저 물건. 감가상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은 익숙한 것을 배척한다.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산 1,000만원짜리 시계를 아들은 원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정의: 럭셔리는 민주주의다
럭셔리의 정의가 변하고 있다. 오늘의 럭셔리가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대격변의 시기다. 기술혁명이 초래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소통의 핵심 플랫폼이 된 소셜미디어, 시장 판도를 좌우하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손, 가난을 경험한 적 없는 밀레니얼 세대의 새로운 소비 취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누구도 미래의 럭셔리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서울에서 20, 21일 열렸던 ‘컨데나스트 인터내셔널 럭셔리 콘퍼런스’가 ‘미래의 럭셔리’를 주제로 잡은 이유다.
럭셔리란 무엇일까. 우리말에서 아직 적확한 번역어를 찾지 못한 이 외래어는 그간 ‘명품’이란 성찰 없는 단어로 번역돼 왔다. 영어의 ‘luxury goods’, ‘luxury item’이 ‘명품’으로 둔갑한 것이 브랜드들의 치밀한 전략이었다곤 할 수 없지만, 초고가품을 자연스럽게 ‘명품’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인식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것은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 같은 홍보문구들은 중고판매를 해봤거나 자기들끼리도 거기서 거기인 디자인을 떠올려보면 금세 코웃음을 치게 된다. 도대체 럭셔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영어사전이 풀이하는 럭셔리의 정의는 ‘꼭 필요하진 않지만 즐거움을 주는 아름답고 비싼 물건’이다. ‘명품’과 같은 가치판단은 들어있지 않다. 반면 한국어사전은 럭셔리를 ‘보기에 값비싸고 호화로움’, 럭셔리 제품을 ‘사치품’이라고 과감하게 번역한다. 부정적 뉘앙스를 물씬 풍기는 사치와 호화라는 단어가 고급스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과 괴리돼 있다. 제품을 물신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적정가치를 인정해주는 중도적 태도의 번역어가 창안되지 않았다. 고로 럭셔리는 그저 럭셔리인 편이 합리적이다.
통통 튀는 팝 컬처를 럭셔리에 과감하게 도입해 “아침에 들고 나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수지 멘키스 보그 인터내셔널 편집장)는 찬사를 받는 영국 핸드백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는 이번 콘퍼런스에서 “패션은 자신의 지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로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에 종언을 고했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설파한 이후 럭셔리의 교시로 군림해온 이 소비이론은 남들은 못 갖도록 끝없이 값을 올려대던 브랜드들의 사악한 가격정책의 근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닐 듯하다. 힌드마치는 “패션은 배타적인 것(exclusive)에서 포용적인(inclusive) 것,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라익스뮤지엄 관장 윔 페이브스 역시 예술사를 근거로 “소수 상류층과 엘리트들의 전유물로서의 럭셔리는 끝났다”고 선포했다. “이제 길거리 어디에서나 럭셔리를 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공급된다. 대중화된 럭셔리. (일종의 형용모순이므로) 그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럭셔리는 ‘소유’에서 ‘존재’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고, 공유는 새로운 개념의 소유가 되고 있다. 세상에 나 혼자만 가질 수 있는 럭셔리라는 건 없다.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럭셔리를 즐기는 경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오직 나만’이라는 독자적인 존재를 표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럭셔리다.”
인스타그램 패션 파트너십 총괄인 에바 첸 역시 ‘럭셔리의 민주주의’를 말했다. “럭셔리의 미래는 민주주의에 있다. 모든 사람을 연결하고, 소비자와 직접 소통해야 한다. 전통적 럭셔리 하우스들은 소셜미디어를 멀리해왔지만, 현실은 이제 전혀 다르다.” 사회적 논란이나 비판이 제기될 때 숨어버리는 브랜드, ‘너는 나를 가질 수 없다’는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는 이제 럭셔리 브랜드의 영리한 전략이 될 수 없다.
대중과의 민주적 소통으로 브랜드를 재창조한 발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텡은 그 모범사례로 콘퍼런스에 초대됐다. 지난해 H&M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발망 대란’을 일으켰던 올해 30세의 이 젊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는 ‘졸리 마담’(예쁜 여성)이라는 발망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화려하고 웅장하며 파워풀한 미래혁신적 스타일로 변모시킨 패션계의 혁명전사다. 290만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거느리고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속속들이 드러내며 진솔하게 대중과 소통해왔다. “발망을 살 여유가 안 되는 사람들을 인스타그램으로 초대해 발망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처음에는 ‘왜 모든 사람을 럭셔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냐’는 비판도 받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내 작업을 이해해준다. 나는 고아원 출신이고, 입양됐으며, 흑인이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내 현실이고,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믿도록 만들 수 있다.”
누가 럭셔리를 사는지는 모두 안다
누가 ‘럭셔리’를 사는지는 모두가 안다. 중국인들이다. 현재 전 세계 럭셔리 제품의 35%를 사고 있는 중국인들은 2025년이면 50%를 싹쓸이할 것으로 추산된다. 시계는 이미 전 세계 물량의 절반을 구매하고 있다. 어원 램보그 HSBC 소비자 및 리테일 자산 연구관리 책임자는 “중국인들이 어떻게 럭셔리 산업을 바꿔놓았는지”를 설명했다. 명 왕조 이후의 중국은 럭셔리 왕조라는 내용의 책 ‘더 블링 다이너스티’를 쓴 램보그는 중국인들로 인해 럭셔리 마켓의 규모가 두 배로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에이미 킴 매킨지 파트너에 따르면, 중국의 도시 거주자 중 여권을 소지한 인구는 6%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6%밖에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유럽 소비자는 이미 럭셔리 제품을 사지 않은 지 오래다. 미국이나 일본은 유럽보다는 좀 사는 편이지만, 중국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브랜드들은 중국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해 자신들의 DNA를 버리고 제품을 중국화했다. 커다란 용 무늬가 수놓아진 빨강 블라우스, 다이아몬드가 너무 많이 박혀 있어서 손목이나 들어올릴 수 있을까 걱정스런 시계 등이 대표적. 하지만 램보그는 “중국 소비자들은 중국적인 것을 싫어한다. 파리에서 파리 사람들이 쓰는 덜 화려한 모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카르티에가 다이아몬드를 다 떼버린 심플한 시계로 돌아온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 시장이 열리면서 벌어진 착시와 시행착오는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묻지마 판매’에 여념이 없었던 브랜드들이 수요감소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소비자 분석과 소통에 나선 것이다. “샤넬은 정책을 바꿔 누구에게 물건을 파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취향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럭셔리 소비자들은 평균 연령이 유럽보다 15세, 미국보다 20세나 젊다. 취향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럭셔리는 앞으로 캐주얼화로 가는 게 맞다.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지 않는 아시아 소비자들에게는 백팩이 핸드백보다 인기다. 전통적 럭셔리는 욕구의 위계에 의거한 피라미드형이었지만, 이제는 슈퍼-하이엔드가 될 필요가 없다. 슈퍼리치들은 오히려 럭셔리 제품을 사지 않는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여행, 외식 같은 경험을 산다.”
럭셔리의 새로운 트렌드 ‘첨단기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럭셔리 카는 벤츠가 아니라 전기차 테슬라다. 에르메스는 애플과 협업해 럭셔리 애플워치를 출시했다. 진보라는 말로는 부족한, 기술혁명의 시대. 전통과 고전이 더 이상 럭셔리의 고유영역이기는 힘들다. 미래를 앞당겨 살고 있는 사람, 얼리 어댑터들이 ‘너드’의 이미지를 벗고 패션의 트렌드세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투박한 기계장치와 매끈한 럭셔리 패션이 양과 음처럼 서로를 갈망하고 있다. 센서가 내장된 옷, 태양광 충전 포켓이 있는 핸드백 같은 스마트 패션은 럭셔리가 가장 치열하게 연구해야 하는 주제다.
비즈니스 그 자체가 디지털화할 필요가 있다. 와이어드 컨설팅 디렉터 소피 핵포트는 가상현실(VR)에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오늘날 아이들은 가상현실이 모국어다. 가상현실은 조만간 인간 상호작용을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대체하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의 시대에 우리는 매장에서 직접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되고, 옷걸이를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는 전에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기계와 얽히고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그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이다.”
이틀간의 콘퍼런스 중 행사를 주관한 수지 멘키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라고 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역시 미래에는 럭셔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듯하다. 크리스털 주얼리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와 배우 셀마 헤이엑의 남편 프랑수아 앙리 피노가 이끄는 케어링 그룹이 럭셔리의 핵심적 요소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구찌, 생로랑, 발렌시아가, 보테가 베네타, 브리오니 등을 소유하고 있는 케어링 그룹의 지속가능성 부서 최고책임자 마리 클레르 다뵈는 “지속가능성 없는 럭셔리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우리에게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품의 제조 공정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정확히 파악해 분석하는 다뵈는 “지난해 우리가 환경에 남긴 족적 중 93%는 불가피한 것, 7%는 기업활동에 의한 것으로 분석됐다”며 “이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료 혁신 랩을 만들어 구찌 등 다양한 브랜드에 사용되는 섬유를 친환경적으로 생산하고, 악어가죽 소싱도 파트너십을 통해 환경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면과 폴리에스터를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 헌옷으로 새로운 원단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전통적 방식의 면보다 환경자원을 80% 덜 쓰고, 물 사용량이 30% 적다. 모든 브랜드가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 재료를 쓴다면 세계적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다.”
1885년 오스트리아에서 창업될 때부터 수력발전을 이용해 크리스털을 생산해온 스와로브스키 역시 중국에서의 물 프로젝트, 인도 아프리카 브라질 등에서의 워터스쿨 프로그램 등을 통해 누구나 맑은 물을 먹을 수 있는 세계에 기여하고 있다.
착한 기업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 제품이 자동적으로 럭셔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는 확실하다. 못된 기업이 럭셔리일 수는 없다. 와이어드의 핵포트는 “스토리텔링이 가장 중요한 시대다. 기술 발전으로 위성의 감시 카메라가 어디에든 카메라를 들이댄다. 럭셔리 기업이라면 고소·고발 이전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이것을 브랜드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해야 한다.” 순환경제, 공유경제의 시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을 럭셔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없지야 않겠지만, 분명히 줄어들 것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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